1956년 5월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그보다 네 해 전의 2대 대선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직접 선거 방식으로 치러진 이 선거에서는 현직 대통령인 자유당 후보 이승만이 유효표의 70%에 해당하는 504만 6,437표를 얻어 승리했다. 이승만의 당선은 예정된 것이었다. 그의 재집권을 저지할 가능성을 보였던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선거 열흘 전인 5월5일 호남 지방으로 유세 가던 도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했기 때문이다. 이 선거에서 무효 표는 185만 6,818표로 집계됐는데,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치는 신익희에 대한 추모 투표 때문이었을 것으로 분석됐다.3대 대선에서 비록 여야 정권 교체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진보 정치의 기치를 내걸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조봉암 후보가 크게 선전한 것이 기억될 만하다. 조봉암은 이승만이 얻은 표의 거의 반에 이르는 216만 3,808표를 얻어 현직 대통령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그는 역시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2대 대선에서도 이승만에 이어 2위로 낙선한 바 있지만, 그 때 그가 얻었던 표는 이승만의 1/6이 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국회를 통한 대통령 간선을 규정한 제헌 헌법으로는 재집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6·25 전쟁 중이었던 1952년 7월 이른바 발췌개헌을 통해 대통령 선거 방식을 직선제로 바꾼 뒤 그 해 8월 2대 대선을 거뜬히 치러냈지만, 3대 대선을 치르면서 대통령 직선제가 저절로 자신의 종신 집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이벌로는 생각해본 적 없었던 조봉암을 유권자 네 사람 가운데 하나가 대통령 감으로 꼽았다는 사실은 독재자의 마음을 세차게 할퀴었을 것이다. 조봉암은 세 해 뒤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형장에서 삶을 마쳤다. 이런 비극적 죽음은 3대 대선에서 이미 결정되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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