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출한 아파트의 거실은 물론 방마다 고색창연한 책들이 들어찬 책장이 천장까지 닿아 있다. 책 한 권 한 권이 모두 손때가 묻어있고 빛이 바랬다. 그곳에서 정년을 훌쩍 넘긴 노학자가 너덜너덜해진 책을 들여다본다. 간간이 미소가 배어나오고, 회상에 잠기기도 한다.원로 영문학자 박일충(74) 건국대 명예교수가 자신의 신변잡기와 일화를 재치 있는 유머로 버무리고 그윽한 인생의 향기를 담은 수필집 '어바웃 계당선생'(역락 발행)을 냈다. 계당선생은 함경도 방언으로 '하는 일이나 행동이 분명하지 않고 우유부단하다'는 의미의 '개단 없다'에서 유래한 말. 자신을 포함해 그렇게 살고 있다는 친구들을 통칭해 부르는 호라고 한다.
"평소에 실수도 잘 하고, 우스갯소리를 좋아하다 보니 그걸 묶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주변에 들려줄 때마다 모두 재미있다고도 하고…"
이번 수필집은 사실상 그의 첫 저서이다. 19세기 영국소설을 전공한 그는 그 동안 '오만과 편견' '생의 노트' '아이아코카 자서전' 등 번역서와, 1980년대 중반 대학생들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 토플 수험서인 '시사 토플'을 낸 적이 있지만 이 책들은 그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5년 정도 준비 끝에 내놓은 이 책에는 '웃으며 살자'는 그의 생활철학과 여유가 그대로 녹아있다. 읽다 보면 슬며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첫번째 글 '삥땅론'을 보자. <아내가 교회 간 사이에 책장의 책들을 끄집어내어 전에 숨겨놓은 돈을 찾고 있었는데 갑자기 마누라가 들어왔다. …결국 절반은 약탈당했다. 다음에는 책의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이런 돈은 '생활의 발견' '중세의 '중국의 등 '발견'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에 숨겼다. 그러나 다니엘 부어스틴의 '발견자들'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 넣지 않았다. 발견자는 오로지 나 혼자야지 복수가 되면 곤란하지 않은가.>아내가>
보청기와 얽힌 일화를 쓴 글도 재미있다. <택시를 타고 외출하는데 보청기를 집에 두고 온 걸 알았다. "어떻게 하지요. 돌아갈까요?"라고 말하는 아내에게 "뭘 돌아가. 당신 이야기 뭐 들을 게 있다고. 다른 여자하고 간다면 모를까"라고 했다. 그 순간 긴장하는 운전기사에게 들으라는 듯 아내는 "다음에 여자와 갈 때는 잊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운전사 왈 "두 분 참 재미있으시네요.">택시를>
2부격인 '묘비 앞의 단상'은 그가 영문서적을 뒤적이다가 웃기거나 의미심장한 구절만 모아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노처녀 우체국장의 묘비명. 'returned―unopened'(반송―개봉하지 않았음)> <생전에 성생활에 불만이 많았던 부부의 묘비명. 아내 쪽 '겨우 그 몸이 식었군', 남편 뻣뻣해졌네'> "외국인들의 유머 감각은 대단해요. 죽음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웃음은 죽음마저 이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생전에> 노처녀>
그는 책 뒷부분에 최근 읽은 외국도서 중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3편의 소설을 번역·요약한 내용도 실었다. 중국 소설 '산의 우편집배원'(펭젠민 지음), '폭풍우 속을 난 기러기들'(장융 지음)과 '마키아벨리와 체자레 보르지아'(서머셋 몸 지음) 등이다.
"모두 2, 3년 사이에 읽은 책입니다. 인생을 차분하게 되돌아보는 내용으로 그 충격과 감동이 말할 수 없어요. 전체를 번역하기는 힘이 딸려서 일단 요약을 해보았죠."
이 중 산간 오지마을을 도는 집배원이 나이가 들자 아들에게 그 일을 인수인계하는 과정을 그린 '산의 우편집배원'은 아무래도 그의 요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는 그러나 "정년을 맞았을 때 섭섭한 느낌의 한편으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았지만, 바쁘게 움직이면서 새로운 활력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5년 전부터 컴퓨터를 배우고, 홈페이지(ilchoong.com.ne.kr)를 개설해 각종 자료를 모으고, 이를 소재로 글을 쓰고 있다. "웃음은 생활의 윤활유입니다. 재미있는 경험이나 이야기 있으면 홈페이지에 올려주세요."
함경도 함흥 출신으로 연세대 영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건국대 영문학과 교수와 인문대학장을 지냈으며 97년 정년퇴임했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 박일충씨가 뽑은 묘비의 명문
윌리엄 셰익스피어:벗이여, 원컨대 이곳에 묻힌 유해를 파지 말지어다. 이 묘석을 그대로 두는 자는 복을 받고 나의 뼈를 옮기는 자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존 밴러프(건축가):흙이여, 무겁게 그를 눌러라. 그것은 그가 생전에 그대에게 많은 무거운 짐을 지게 했기 때문이다.
벤자민 프랭클린:낡은 책의 표지가 닳고 문자와 금박이 벗겨져 나간 것처럼 그의 몸은 여기 누워 벌레에게 먹히고 있다. 그러나 작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 음식점의 종업원:…그는 하나님과 눈을 마주쳤네.
어느 구두쇠:지미 와이야트 잠들다. 그는 아침 10시에 죽었으니 점심 한끼를 아낄 수 있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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