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의 인간적인 면모는 어땠을까.25일부터 다음달 27일까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는 '멱남서당 소장 추사가의 한글문헌I―추사 한글 편지'전은 인간 김정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될 것 같다. 김일근 건국대 명예교수가 이끄는 멱남서당 소장 추사 편지 원본 27통, 개인 소장 원본 5통 등 모두 40통의 한글 편지가 전시된다. 편지는 유배 등의 이유로 가족과 헤어져 있는 동안 서울, 평양, 제주 등에서 보낸 것이다. 이 중 38통은 부인 예안 이씨 앞으로, 2통은 며느리에게 보낸 것인데 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종손으로서, 남편과 아버지로서 김정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30대, 40대의 추사는 호방하면서도 생기가 넘친다. 스스로를 '영호유객(嶺湖遊客·영남, 충청 지방의 여행객)'이라 불렀고 평양기생과 염문을 뿌리고는 "임자만 하여도 다른 의심하실 듯 하오나 …다 거짓 말이오니 고지 듣지 마십시오"(1829년11월26일)라고 시치미를 뗀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는 아내에 대한 마음이 절절해졌다. 부인이 1842년 11월 13일 죽었지만 그 사실을 모른 채, 살아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다음날 "간절한 심려로 걱정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고 애절한 편지를 보낸다.
양자를 들인 뒤 "육십이 돼서야 부모 소리를 들었다"고 기뻐하고 손자가 태어나자 이름을 지어보내는 등 대를 잇는 문제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집안 대소사도 일일이 챙겼는데 그만큼 종손으로서 무거운 의무감을 가졌던 것 같다.
추사는 입맛과 입성이 예민하고 까탈스러웠다. 서울에서 제주까지 몇 달씩 걸리는데도 부인에게 장, 김치 등 밑반찬과 심지어 민어, 쇠고기, 약식, 인절미, 건포 등 갖가지 음식을 보내게 하고 반찬 투정도 했다.
추사의 한글 편지에서는 당시 구어체의 예법을 엿볼 수 있다. 추사의 한글 솜씨 또한 붓과 먹의 놀림에 있어서 그의 한자 필법과 유사하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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