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신문에서 읽은 대통령의 철학에 관한 얘기다. 닉슨 대통령 시절, 백악관 비서실장이 대통령이 읽을 정책 브리핑 자료를 작성한 보좌관에게 여러 정책안 가운데 특정 선택을 부각시킨 이유를 물었다. 보좌관은 그게 대통령의 철학에 부합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답했다. 그러자 비서실장은 "대통령은 철학이 없네"라고 일깨웠다. 대통령은 아무 생각이 없다는 불경한 말이 아니라, 특정한 이념이나 노선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는 풀이다. 이 얘기를 소개한 이는 대통령이 철학을 갖지 않는 것은 이를테면 전염병에 걸리지 않은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알듯 모를 듯한 얘기지만, 복잡다단한 국정을 수행하는 대통령은 개인적 신념보다 현실의 요구에 호응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한다. 아주 당연한 얘기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 석연치 않은 면도 있다. 그만큼 대통령하기가 어렵다면 간단하겠으나, 그 것으로 대통령의 책임을 한치도 회피할 수 없는 노릇인 것이 딱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하기가 힘겹다고 토로할 때마다, 애초 호의적이던 국민까지 대통령과 자신의 기대에 함께 실망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국민의 70%가 탄핵에 반대했다고 해서 그에 못지않게 많은 국민이 그의 현실호응, 곧 국정수행에 실망한 사실을 지울 수 없다.
■ 자신의 철학 때문이든 부당한 현실 탓이든 간에, 탄핵으로 직무정지된 노 대통령이 내일이면 제자리로 되돌아 올 것으로 보인다. 당장 관심은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얼마나 세세하게 밝힐 것인가에 쏠린 듯하다. 그러나 소수의견 공개여부는 어찌 보면 공연한 논란이다. 소수의견이 총선 승리로 한껏 고양된 대통령의 명분과 권위를 다시 훼손할 것을 걱정하는 쪽의 자가발전 기미마저 있다. 정작 국민의 진정한 관심은 돌아온 대통령이 국민 앞에 어떤 자세로 서서, 어떤 귀임사를 내놓을지에 있으리라고 본다.
■ 지난 기억에 비춰 노 대통령은 철학적 자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극기(克己)적이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말한다. 둘은 상반된 듯하지만 개인적 신념에 집착하는 점은 같다. 국민적 지지에 헌법적 정당성까지 확인했으니, 한층 굳건한 소신을 피력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글머리 얘기처럼 그런 철학은 현실과 동떨어져 공허하기 십상이다. 부당한 현실을 타파했다고 여길지 모르나, 그는 여전히 개인적 신념보다 훨씬 중대한 현실의 요구에 호응해야 하는 대통령이다. 그 요구가 뭐냐고 묻는다면, 그에 실망했던 국민 70%의 여론과 헌재 결정문의 소수의견을 거듭 되새길 것을 권한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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