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2일 국회의 탄핵안이 가결된 직후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심경을 "허물을 벗는 고통"과 "아이를 낳는 진통"이라 비유한 바 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과를 목전에 둔 지금 상황은 달라 보인다. 17대 총선 이후 대통령과 여권은 자신감에 가득 차 있다. 지난해 10월 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온 40여명으로 시작해 원내 정당 중에서 가장 낮은 지지를 받던 정당이 불과 반 년 만에 과반수의석을 확보한 제1당이 되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의도한 결과였는지는 차치하고,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이반하던 지지세력을 재결집시키고 결과적으로 열린우리당에게 총선 승리를 안겨주었다. 이런 측면에서 열린우리당의 성과를 가장 흡족하게 여기는 사람은 노 대통령과 청와대의 측근인사들일 것이다.노 대통령은 총선 결과를 자신에 대한 지지의 표현으로 믿고 있는 듯하다. 김혁규 전 경남지사를 차기총리로 고집하고 집권여당의 정동영 당의장과 김근태 전 원내대표를 입각시키려하며 강력한 리더십으로 집권 2기를 이끌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는 소식 등이 그 증거다. 대통령의 측근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정우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은 현 정부의 정책개발 노력을 자화자찬하면서 50%의 지지로 임기를 마무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자신감이지만 이는 오만이기도 하다.
총선에서 나타난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를 곧바로 노 대통령에 대한 지지와 신임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번 총선은 탄핵이라는 특수국면 하에서 많은 유권자들이 선택을 강요당했다. 탄핵이라는 돌발변수가 없었다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보다 이성적으로 총선을 대비했었다면, 이번 총선은 아마도 노 대통령의 치적에 대한 평가가 주된 이슈가 되었을 것이다. 현정부의 정책과 그 결과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누가 열린우리당의 승리를 자신할 수 있었을까.
보통 유권자들은 투표 시 후보나 정당을 결정할 때 인지적 평가와 감정적 지지 사이에서 고민한다. 탄핵정국 이전까지 열린우리당이나 노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그리 높지 않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선에서 노 대통령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의 상당수가 아마도 여권에 대한 심정적 친근감과 정책혼선 및 부재를 노정하는 정부의 무능력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을 것이다. 탄핵이라는 특수상황은 이러한 유권자들의 감정을 격렬하게 자극했고 그 결과 열린우리당은 과반수를 확보했다.
탄핵정국으로 잠시 잊혀졌던 산적한 경제, 사회적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점증하는 청년실업, 늘어만 가는 가계부채, 해법이 보이지 않는 사교육문제, 이라크 파병 등 현정부가 풀어나가야 하는 문제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탄핵이전과 이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결정을 발표한다. 탄핵안이 기각되지 않으리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대신 관심은 소수의견의 공표 여부, 즉 9명의 재판관 중 몇 명이 탄핵안에 찬성하였는지에 모아지고 있다. 헌법재판관들의 의견 분포는 탄핵절차의 법적 마무리라는 측면에서는 중요하지만 그 자체가 대통령의 공과에 대한 정치적 심판이 될 수는 없다. 탄핵으로 야기된 모든 결과는 오로지 탄핵이라는 특수 상황에 국한하여 해석해야 한다.
민의를 잘못 읽고 탄핵안을 가결시킴으로써 헌정질서를 문란시킨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죄과에 대한 심판은 17대 총선 결과로 나타났다. 이제는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차례이다. 어떤 사람도 자신이 내세우는 대의의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국민은 아직 최종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자신의 말대로 허물을 벗고, 아이를 낳는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면 이제는 겸허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개혁과 변화의 열망에 답변할 때다.
/정하용 경희대 국제지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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