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 1949년 12월1일 경기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서 태어났다. 꼭찌 끝순이 말순이처럼 다음 번엔 딸말고 아들 낳게 해달라고 빌며 지어준 슬픈 이름이다. 첫 울음을 터뜨린 순간부터 딸이라는 사실만으로 너는 축복 대신 한탄 소리를 들어야 했다. 다행히 네가 세상에 나온 지 3분도 되지 않아 쌍둥이 동생 귀남이가 태어났다. 집안 식구들은 기쁨에 넘쳤고, 내리 딸만 둘을 봤던 아버지는 "아 글씨, 내가 뭐라고 했어. 이번엔 아들이라고 했지"라고 뽐내며 장터 술집에서 막걸리를 돌렸다.
우리의 슬픈 딸들
문호리 낚시터 근처 너의 집은 담배며 싸구려 물건을 파는 전방(廛房)이었다. 억척스러운 어머니(정혜선)는 간간히 낚시꾼들에게 매운탕까지 끓여주고 받는 돈으로 살림을 꾸려갔다. 아버지 이만복(백일섭)씨는 선거 때마다 낙선 후보만을 미는 선거꾼. 구들장을 지고 있는 시간이 더 많은 양반이었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많지 않았지만 아들에 대한 '집착'만은 남달랐다는 점에서 너의 어머니 아버지는 그 시대의 부모의 전형이었다.
어머니는 네가 쌍둥이 동생인 귀남이를 넘어서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내 그럴 줄 알았어, 나올 때부터 먼저 나오더니 귀남이 앞길을 막지"였다. 가슴에 쐐기를 박는 듯한 그 끔찍스러운 말을 피하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여고생 때까지 너는 그림자처럼 자신의 존재를 지우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했다. 아직도 기억한다. 귀남이보다 등수가 잘 나온 성적표를 내밀었다가 구박을 받고 뒷방에 혼자 앉아 울던 그 날을.
옆집 살던 성자(오연수)에게 잡지 '학원'을 빌려보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던 너에게도 꿈이 있었다. 소설가. 가슴에 숨어있는 슬픔을 너는 글로써 달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혹독했다. 대학입학시험에서 네가 붙고, 귀남이가 떨어졌을 때 그 일말의 희망조차 사라졌다. 어머니가 저주처럼 입에 달던 말이 마침내 현실로 나타났으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단 1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뭣하러 딸을 가르치냐. 고등학교 공부 시킨 것만해도 과분하다"는 생각에 동의했다.
나도 사람이었다
그때 네가 갈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서울 청계천의 한 봉제 공장. 조장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는 화장실조차 맘놓고 갈 수 없었던 그 어둡고 컴컴한 지하에서 너의 청춘은 빠르게 소멸해 갔다. 수백 번, 수천 번 재봉틀을 돌렸지만 너는 무엇 때문에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번 돈을 동무인 말자나 봉순이가 그랬던 것처럼 꼬박꼬박 집에 부쳤다. 누이들이 눈물과 바꾼 돈으로 세상의 많디 많은 오빠와 남동생들은 다방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연애에 열중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너는 통곡을 했을 테지.
지옥 같았던 구렁텅이에서 너를 건져내 준 사람은 한 점 혈육도 없는 김밥 파는 할머니였다. '영혼의 감옥' 같던 공장을 탈출, 길거리를 헤매다 배고픔에 쓰러진 너를 그 할머니는 군말 없이 거둬줬다. 여자라고 무시하지 않았고, 여자라고 미워하지 않았다. 낮에는 김밥을 만들어 팔고, 밤에는 방송통신대학에 다녔다. 힘들어 코피를 흘리기도 했지만 행복했다. 그 시절 틈틈이 썼던 소설이 문학잡지에 추천되는 기쁨도 맛봤다.
마침내 사랑도 너를 찾았다. 귀남 친구 석호(한석규). 번번히 낙방한 귀남이와 달리 일찌감치 사법고시에 합격해 법무관이 된 그 사람은 따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봉제공장과 공사장 식당을 전전하던 너에게 과분한 상대였다. 여자라서, 가난해서 배운 것이 없어서, 부끄러웠던 너에게는 사랑조차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너는 그가 내민 손을 잡는다. 그때 너는 여자도, 아들 앞길 막는 한심한 딸년도 아니었다. 배운 것 없는 가난한 노동자도 아니었다. '사람 이후남'일 뿐이었다. 시집 식구들의 반대도, "주제 넘는 일"이라며 고개를 외로 젓던 어머니의 냉담함도 너의 선택을 말릴 수 없었다.
2004년의 이후남
석호와 결혼해 산 지 올해 스물 여덟해. 쉰 다섯 살이 된 너는 이제서야 고백한다. "가족도, 결혼도, 사랑도, 너를 후남이라는 이름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고. 변호사인 남편은 세심하고 배려 깊었지만 여전히 가부장제도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만큼은 참지 못했다. 가정을 지키는 사랑스러운 아내로서만 너는 그의 품에 안길 수 있다. 연년생으로 낳은 아들 녀석과 딸도 언제나 너에게 '엄마'이길 요구했다. 그래서 너는 여전히 수 많은 '후남이' 중 하나일 수 밖에 없었다.
지난해 너는 어머니를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 보냈다. 그리고 어머니 장례식을 치른 꼭 한달 만에 스물 여덟 살, 꽉 찬 나이의 딸을 시집 보냈다. 결혼식장에서 너는 어머니가 숨을 거두기 전 너를 붙잡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 죽으면 귀남이가 너의 친정이여. 친정이 잘 살아야 시집가서도 무시당하지 않고 잘사는 법이여. 그래 더 귀남이 잘되라고 극성이었던 겨." 이땅에서는 어머니도, 너도, 너의 딸도 그렇게 살았고, 살고 있고, 살아야 하는가. 그날 아비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딸을 보며 너는 '여자'로 살았던 지난 세월만큼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 "후남이" 김희애의 아들 키우기
탤런트 김희애(사진)는 출판 칼럼니스트 강철주로부터 '연예계의 하늘에 반짝 빛을 내다 사라지는 혜성이 아니라 항성으로 떠있다'는 헌사를 받았다. '아들과 딸'에서 후남이를 오롯이 그려낸 덕이었다. 12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섯, 일곱 살 연년생 아들을 둔 엄마가 된 '후남이' 김희애에게 그간 못다한 이야기와 실제 삶에서 그녀의 자식키우기를 들어봤다.
84년 하이틴 영화 '내 사랑 짱구'(1984)로 데뷔한 이래 20년의 연기 경력을 자랑하고, 한동안의 공백이 있었음에도 지난해 SBS 드라마 '완전한 사랑'에서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영애 역을 열연해 올해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대상을 거머쥔 그녀는 단호하게 '선언' 했다. "후남이는 이제껏 맡았던 역할 중에 가장 제가 좋아하고 잊지 못할 역할이에요. 그땐 정말 후남이가 된 것 같았어요. 연기를 하면서 전혀 힘이 들지 않았거든요."
"처음엔 그렇게 좋은 역할인 줄 모르고 맡았다"는 그녀는 작가 박진숙씨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대사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갔다"고 했다. 그 덕분에 김희애는 사람들에게 '실제 '후남이'로 산 게 아닐까?'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사실은 딸만 둘인 집에서 커서 그런 남녀차별은 경험해 보지 못했어요. 오히려 그런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컸죠. 하지만 만약 내가 후남이라도 드라마에서처럼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아들 둘을 키우고 있는 그녀는 요즘 새로운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 "어휴, 사람들이 약아져서 아들 키워봐야 별 소용 없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아니면 남자애는 많고 여자 애는 적어서인지, 나보다는 다들 딸 가진 엄마를 부러워하는 걸요."
'자식을 키우는 엄마 마음'으로 김희애는 몇 년째 소아암 돕기 프로인 MBC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의 사회를 맡고 있다. 부드러운 미소 속에 차돌 같은 단단한 마음을 몰래 숨겨 놓은 것 같은 김희애. 그녀는 이렇게 우리 가슴 속에 '엄마가 된 후남이'로 살고 있다. /김대성기자
■그때 한국일보에는/"나이·학력 관계없이 인기"
92년 10월 3일 '사랑이 뭐길래' 후속으로 첫 선을 보인 MBC 주말드라마 '아들과 딸'은 방영 한달 만에 시청률이 60% 대에 달했다. 지난 3월 종영한 국민드라마 '대장금'의 최고 시청률이 57.8%였다는 점만 봐도 이 드라마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드라마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팝송 '에버 그린'이 음반으로 발매된 지 1주일 만에 5만 장이 팔려나갔고, 귀남의 친구로 지적이고 사려 깊은 석호 역을 맡았던 한석규 역시 신인 딱지를 한번에 떼고 스타덤에 올랐다.
한국일보는 11월 21일자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아들과 딸'은 연령에 관계없이, 학력별로도 큰 편차 없이 고루 사랑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사회에 아직도 짙게 남아있는 남아선호경향이라는 주제가 60년대 후반 작품배경과 어울려 최근 봇물처럼 쏟아지는 선정주의 드라마에 식상한 시청자들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극본을 쓴 박진숙(45)씨는 "남아선호 경향의 피해의식은 아직도 많은 여성들에게 뿌리깊게 남아 있음을 확신하고 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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