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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포츠 50년]"내 자리는 트랙…후배 양성에 전력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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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포츠 50년]"내 자리는 트랙…후배 양성에 전력질주"

입력
2004.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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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장재근82·86년 아시안게임 육상 200m를 연패하며 '치타'라는 별명을 얻은 아시아 최고 스프린터이지만 그 보다는 TV의 남자 에어로빅 강사로 더 유명해진 장재근(42).

184㎝의 쭉 빠진 체격과 부드러운 근육, 다이내믹한 율동, 비음 섞인 구령, 몸에 짝 달라붙는 화려한 의상 등 섹시 이미지가 물씬한 남자 강사의 등장은 파격이었다.

금메달리스트의 상업적 변신에 당황과 거부감을 표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그는 결국 안방 시청자를 사로 잡고 MC, 광고모델, 쇼핑호스트 등 다방면으로 활동영역을 넓히며 인기 방송인으로 성장했다.

육상과는 완전 결별한 것 같던 그가 지난해 초부터 태릉선수촌에서 대표팀 코치로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

외도를 완전히 끝낸 것은 아니다. 지금도 1주일에 한번 홈쇼핑에 나가고, 최근 '트루고'라는 브랜드의 레저용 기능성 의류를 개발했다. 또 뙤약볕 아래의 관중과 선수들을 위한 '얼음조끼'를 생산할 계획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 단거리가 완전히 망가질 것 같아 돌아왔다"는 게 복귀 이유이다.

"나는 영원한 육상인입니다. TV에 출연하는 것을 비난하고, 제가 오락프로에서 말, 돼지 등과 달리기 하는 것을 보고 창피해 혼이 났다고 하는 동료들이 있어요. 오히려 내가 더 창피하죠. 그래도 TV에 나가 육상을 PR하는 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방송에 나가서도 항상 육상인으로 불러 달라고 했어요."

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3연패에 실패한 후 마땅한 자리가 없어 한전 성북지점 요금과 직원으로 근무하던 장재근은 91년 말 개국하는 SBS 아침프로의 생활체조 강사 제의를 받고는 40일간 하루 5시간의 고된 연습 끝에 출연, 처음부터 주부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는 끼를 타고 난 방송인 같이 보였어도 "아무리 겉으로는 웃어도 항상 남의 집 같이 어색하고 스트레스가 많았다. 육상 훈련장에 돌아오니 너무 푸근하고 행복하다. 경제적으로는 부족하더라도 고향이 좋다"며 지금의 생활에 훨씬 만족해 하고 있다.

그 동안 돈을 꽤 벌었지만 IMF때 주위 빚 보증 선 게 잘 못 돼 집까지 몽땅 날렸다가 이제 다시 집을 마련하고 아내, 3남매와 함께 밥 먹는 데 걱정 없을 정도란다.

현재 태릉에서 대표선수 3명을 지도하고 있는 그의 목표는 아시아 1인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26년째 안 깨지고 있는 서말구의 100m 한국기록(10초34)과 자신이 85년 기록한 200m 한국기록(20초41)에 도전하는 것. 그러나 지금의 최고기록은 10초48, 21초30으로 아직 멀기만 하다.

"몸을 만드는 것 보다 정신을 만드는 게 더 힘들어요. 요즘 선수들은 목표의식이 뚜렷하지 못해요. 목표가 가까워지면 고통을 참아 '데드 포인트'를 넘어야 기량이 뛰어 오르는데 자꾸만 앞에서 주저 앉아요."

"솔직히 나도 지금까지 의욕이 앞서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었죠. '나는 했는데 왜 너는 못하냐'고 질책하곤 했는데 이제는 나를 버리고 우선 상대를 이해하며, 선수와의 사이에 놓인 벽을 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는 학교체육이 부실해져 선수가 안 나온다며 돈을 벌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재미난 육상클럽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밝힌다. "굳이 선수를 안 하더라도 육상을 배워 친구들한테 폼을 재는 아이들이 생기면 육상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선수 지망생도 늘어나겠지요."

그는 한전 직원시절 시작한 골프를 요즘도 열심히 한다. 당시 프로골퍼가 되기 위해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세미프로 테스트에 5번 응시해 모두 실패했다.

결국 프로골퍼는 못하게 됐더라도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도전이기 때문에 꼭 테스트에 합격할 때까지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한다.

/유석근 편집위원 sky@hk.co.kr

■1969년 5월14일/"축구로 전투" 軍양지팀 105일 전훈

북한의 66년 영국 월드컵 8강진출에 자극 받아 중앙정보부가 창설한 것이 '양지' 팀이었다.

정보부는 강제 스카우트로 인한 말썽에도 불구 3군 팀 소속의 대표급을 모조리 이적시키고 심지어 적령기의 미입대자 가운데 우수선수가 있으면 바로 입대케 해 67년 2월 양지를 만들었다.

이로써 해병대에 있던 김정남 김호 김기복 김삼락 이회택 이이우, 육군의 이세연 서윤찬 임국찬 정강지 박이천 박광조, 공군 대위였던 허윤정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모였다.

대우는 군인 신분임에도 당시 실업 팀인 대한중석 석탄공사 제일모직 한국전력에 못지 않았고 이문동 정보부내 잔디구장서 특별대우와 엄격한 규율 속에 훈련하는 선수들은 개인능력이 뛰어난데다 남다른 긍지와 투지를 갖고 경기에 임해 국내에 적수가 있을 수 없었다.

정보부는 양지팀을 명실공히 국가대표팀으로 만들기 위해 69년부터는 국내대회에 참가시키지 않고 해외훈련에 집중토록 했다. 그 해 5월 태국의 국제군인축구대회 극동지역 예선을 거쳐 그리스의 본대회 준결승에서 알제리에게 석패한 양지는 그 길로 서독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위스 인도 등을 돌며 친선경기를 펼치고 105일만에 귀국했다.

선수 대부분이 국가대표 였기 때문에 70년 멕시코 월드컵 출전을 목표로 한 대표팀 강화훈련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특별 배려였다.

그러나 양지는 천하를 호령하던 김형욱 정보부장이 경질되고, 70년 1월 취임한 장덕진 신임 대한축구협회장이 역시 '북괴 타도'를 외치며 국가상비군 청룡 백호를 구성함에 따라 그 해 3월, 3년 1개월 만에 해체되었다.

■1976년 5월7일/남북축구 첫대결 0-1 敗

한국 축구가 북한과의 대결에 대비해 양지 팀을 창단하는 등 대표팀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첫 만남은 성인대회가 아니라 태국 방콕의 제18회 아시아 청소년대회(19세미만) 준결승에서 이루어졌다.

온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킨 이 경기는 내용은 대등했지만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인한 0-1의 패배로 끝났다.

한국은 후반 16분 GK 함영준이 볼을 잡으려던 중 맹렬하게 대시한 북한 FW 황상해가 몸을 부딪치며 헤딩슛을 하는 바람에 바닥에 나뒹굴었다. 함이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못 일어나자 주장 장기문이 경기 중단을 요청했으나 주심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진행시켰고, 이 와중에 볼이 다시 한국 문전으로 날아 오자 먼저 일어난 황상해가 빈 골문에 차 넣어 득점한 것.

결국 북한은 결승서 이란과 0-0으로 비겨 공동우승, 한국은 태국을 누르고 3위를 했다.

당시는 북한 스포츠가 월드컵 8강, 72년 뮌헨올림픽의 사격 금메달(이호준)로 남쪽을 앞서가고 있는 상황이라 북한에 지는 것 만큼은 절대 용납이 안 되는 게 국내 분위기. 더구나 74년 아시안게임에서는 처음 출전한 북한을 피하기 위해 예선 1,2차 리그에서 고의패배를 당하고 탈락했을 정도라 충격은 적지 않았다.

남북축구는 이후 78년 방콕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최초로 성인팀이 맞붙어 0-0 무승부로 공동우승을 기록했다.

■1977년 5월21일/염동균, 허망한 '6개월 챔프'

일본의 로얄 고바야시를 15회 판정으로 꺾고 김기수 홍수환 유제두에 이어 4번째로 세계 챔피언에 오른 염동균의 시대는 허망하게 6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WBC 슈퍼밴텀급 챔피언 염동균(25)은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에서 가진 2차 방어전에서 홈 링의 윌프레도 고메스(20)의 소나기 펀치를 맞고 12회 2분 20초 만에 KO패를 당했다.

두뇌 복서인 염은 1회에 예리하고 짧은 카운터 펀치를 날려 75년 아마추어 세계선수권자인 고메스를 다운 시키고 3회까지 호조를 보였으나 이후 연달아 좌우 강타를 맞아 10회 이후에는 KO를 모면하고 시간을 연장하는데만 급급할 뿐이었다.

그러나 염동균이 이 경기서 받은 개런티는 9만 달러. 당시로는 매니저료(33%)와 비용을 제하고 절반만 해도 웬만한 집 한 채를 사고 남는 2,250만원의 거금을 단번에 쥔 것이다.

그는 쉴 틈 없이 6월 27일 WBA 슈퍼밴텀급 4강 진출권을 놓고 WBA밴텀급 챔피언이었으며 동갑인 홍수환과 맞붙었으나 판정패했다. 또 한달도 안돼 일본에서 가진 일본 슈퍼밴텀급 3위 요시다 슈조와의 경기에서는 2회에 다운되고는 주심이 카운트를 모두 세기 전에 일어나 관중의 야유를 받으며 링을 내려감으로써 국내 권투계에 분노와 충격을 안겨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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