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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시인 여덟번째 시집 '한 잔의 붉은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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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시인 여덟번째 시집 '한 잔의 붉은 거울'

입력
2004.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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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49·사진) 시인이 여덟번째 시집 '한 잔의 붉은 거울'(문학과지성사 발행)을 냈다. 4년 만이다.그는 독특한 상상력과 이미지를 언어로 직조해 시를 짜는 시인이다. '여성이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는 그의 오랜 문제의식이 바탕에 흐르고 있다. 새 시집도 그런 시인의 작업에서 나온 것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붉은 색'이다. 시집의 제목,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한 줄기 차디찬 핏물이 신발을 적실 것처럼"이라는 시인의 말, 빨간 물고기, 붉은 전선, 붉은 피, 붉은 얼룩, 붉은 파도 등 시편 곳곳의 언어가 그렇다. 매우 끔찍하고 처절하다.

이전의 시집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에서 매를 맞거나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등 억압받는 여성의 현실을 묘사했던 것과 달리 새 시집에서는 비난할 현실조차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현실보다는 꿈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시집의 '현실 없음'은 역설적으로 현실이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를 가리킨다. 아름답지 않고 비참한 꿈 속의 이미지들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다. '네 꿈의 한복판/ 네 온몸의 피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그곳/ 그곳에서 나는 눈을 뜰래// 네 살갗 밑 장미꽃다발/ 그 속에서 바짝 마른 눈알을 치켜뜰래'('붉은 장미꽃다발'에서)

그 붉은 빛이 의미하는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출산의 고통이다. 김혜순씨 시의 중요한 이미지 중 하나였던 '물'은 '한 잔의 붉은 거울'에도 빈번하게 등장하며, 새 시집에서 물은 붉게 물들어 있다. 핏물은 해산하는 여성의 고통을 상징한다. '바다에서 바다를 낳으려고 몸 풀고 있는 파도/ 내 몸을 밀물처럼 낳았다가 썰물처럼 끌어안고/ 다시 또 밀물처럼 끌어안는 엄마의 잠 속/ 아침이면 해님 떠올라 붉은 양수로 가득 감쌀 내 몸'('꿈속에 꿈속에 꿈속에'에서).

그러나 여성에게는 숙명인 이 고통은 구원의 다른 이름이다. 여성은 '붉은 고통'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생명을 만들어낸다. 성경의 요나처럼 물 속으로 들어간 시적 화자가 아이를 낳는 '그녀, 요나'는 시인이 출산의 붉은 고통을 거쳐 세상에 내보내는 시이기도 하다. '어쩌면 좋아요/ 고래 뱃속에서 아기를 낳고야 말았어요/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못했는데/ 사랑을 하고야 말았어요'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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