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사와 생활사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재구성하려고 애썼습니다. 10년 동안 따라다니던 오십견이 '한국사 이야기'를 탈고하고 나니 씻은 듯 낫더군요."11일 경기 구리시 아천동 집필실에서 만난 역사학자 이이화(67)씨는 큰 짐이라도 벗어놓은 듯 홀가분한 얼굴색이었다. 10년 전 집필을 시작한 '한국사 이야기'(한길사 발행)를 최근 모두 22권으로 완간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권은 일제식민지 시기를 다룬 '빼앗긴 들에 부는 근대화 바람'이다. '한국사 이야기'는 1998년 출간된 첫 권 '우리 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부터 해방 직전까지 5,000년 우리 역사를 200자 원고지 무려 2만5,000장 분량에 담아냈다.
'한국사 이야기'의 완간은 여러모로 기념비적인 의미를 갖는다. 학자 한 사람이 이처럼 방대한 분량의 한국사 통론(通論)을 서술한 것이 우선 처음이다. 통론으로 나온 한국사는 거의 1∼2권짜리인데다,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다시 찾는 우리 역사' 정도를 제외하면 최근 10년 사이에는 통론 형태의 한국사 책이 나온 일이 드물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이씨가 "역사는 민중의 삶이 녹아 있는 실체"라는 시각에 따라 일관되게 민중사, 생활사를 중심으로 한국사를 서술한 점이다. '지리산 백무동에서 화전을 일구며 사는 김돌쇠는 이사한 사촌형 김길동을 찾아 서울로 나들이를 왔다. 기차를 타고 경성역에 내려 네온사인을 본 김돌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제 식민지기에 2,000만 동포가 3,000만 동포로 불어나는 과정을 설명하는 마지막 권 첫 장 첫 줄만 읽어도 이런 점이 또렸하다. 그 덕에 이이화의 한국사 통론은 한국사를 다룬 어떤 책보다도 읽기 쉽고 재미있다. 전공이 조선후기사이지만 그는 어느 시대이건 관련 자료를 충분히 읽어 소화했고, 각 시대마다 전공 소장학자들에게 원고를 검토해주도록 해 조언을 들었다.
10년 작업 동안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은 원고 마감 약속을 지키느라 사람을 피해 집필 장소를 이곳저곳 옮겨다닌 일이다. 95년 고대사 4권 분량을 쓸 때에는 전북 장수의 한 폐교 관사에 머물렀고, 98년에는 김제군 금산사 월명암으로 칩거해 고려 편을 완성했다. 집으로 돌아온 것은 조선시대 편 집필을 시작한 99년 겨울이다. "숨는다고 숨었는데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더군요. 얼굴 보자고 찾아오는 지인들이 한둘이 아니고, 입으라고 옷 사다 주는 사람, 맥주를 박스째 들고 와 놓고 가는 사람 등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이후 역사를 쓰는 데는 참고할 자료가 많은데 구리 집필실에 있는 그 자료를 지방으로 옮기기 힘들었던 것도 자택으로 돌아온 이유 중 하나다.
민중의 처지에서 역사를 보면서도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는 그의 사관은 '임진왜란'을 '조일전쟁'으로, '병자호란'을 '조청전쟁'으로, '일제강점기'를 '일본 식민지 시기'라고 한 용어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책에서 '실체가 확실하지 않고 근거가 없는데도 역사를 국수적인 분위기로 재단하는 것은 보편적 역사의 과학성에 어긋난다'고 밝힌 것처럼 "역사는 항상 사실에 근거한 실체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하지만 그는 "민족과 국토의 재통일이 현단계 우리 민족의 최대 과제"이기 때문에 민족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학술·사회단체 활동이 활발한 그는 고문, 자문위원 등등으로 이름 걸어놓은 곳만 20개쯤 된다. 요즘 가장 열성을 내는 것은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응하는 고구려역사문화재단 활동이다. 집 1층 차고를 개조해 쓰고 있는 집필실은 몇 차례 시도했지만 결국 끊지 못한 담배 냄새로 늘 매캐하다. 그는 내년부터 또 어딘가로 숨어 들어가 "원고지 4,000장 분량의 2권짜리 동학농민전쟁사를 쓸 계획"이다. 이 책이 나올 때쯤이면 평생 역사만 사랑하며 살아온 그의 나이 고희(古稀)를 헤아릴 것이다.
/구리=글·사진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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