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풍'의 근원은 뭘까.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 이순신의 '노래'가 방방곡곡에서 들린다. 김훈씨의 소설 '칼의 노래'를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가결 후 다시 부르더니,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도 지난달 28일 충무공 탄신일을 맞아 힘차게 불렀다. 드라마도, 만화도, 영화도 이순신을 다시 목소리 높여 부르고 있다.도대체 지금 왜 이순신인가. 멸사봉공의 충신이요, 절망의 상황에서도 "신(臣)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며 용기와 지혜를 발휘한 명장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금 백성은 도탄에 허덕이고, 탐관오리가 나라를 어지럽히고, 적이 강토를 짓밟으려고 해 이 땅이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단 말인가.
그럴 수도 있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나라, 청년들은 할 일이 없어 방에 쳐 박혀있고, 중년들은 일자리에서 쫓겨나 거리를 떠돌고, 카드 빚에 쫓긴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얼싸안고 바다로 뛰어들고, 중국의 뜀박질이 우리의 생존까지 위태롭게 하는 세상. 시인 김지하가 일찌감치 '오적(五賊)'이라고 결론을 내린 족속들은 당파싸움, 낡아빠진 이념 논쟁, 부정부패, 현실왜곡으로 백성의 안위는 돌보지 않는 세상.
지금 여기저기서 들리는 '칼의 노래'가 이럴 때 언제나 역사에 등장하곤 했던, 세상을 뒤집어 엎을 영웅을 바라는 백성과 그런 영웅이 되고 싶어하는 '오적'들의 열망의 노래는 아닐까. 거기에는 피의 냄새가 난다. 이순신의 칼이 가진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함'이 아닌 탐욕의 냄새가 난다. 이성보다는 광기의 냄새가 난다.
두렵다. 그 두려움 때문에 '칼의 노래'를 다시 한번 읽는다. 한국일보 문화부 선배로 한때 나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준 작가의 의도와 별개로 이번에도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두려움'뿐이다. 임금을, 조정 중신들을, 적을, 백성을, 부하를, 칼을, 죽음을 두려워했기에 이순신은 작가의 말처럼 "오직 바다를 통해 현실을 보려 했고, '바다'라는 사실에만 입각해 살고 죽었을 것"이다. '끝나지 않은 운명에 대한 전율로 몸을 떨었을 것'이다.
'칼의 노래'가 말하는 이순신의 칼은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는(一揮掃蕩 血染山河)' '죽음을 받아내는 것이자 죽음 내어주는' 것이다. 작가는 말했다. "타인을 베는 칼은 순정한 칼이 아니다. 이때 이미 칼은 칼로서 베어지지 않는 생의 더러운 역사에 묶여있다. 순정한 칼이 진정으로 벨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 칼의 도덕성은 그렇게 엄하고 비극적 이다"라고 (남재일 지음 '나는 편애할 때 가장 자유롭다'에서).
두렵다. 그런 칼의 순수성과 도덕성을 모른 채, 애국과 개혁의 이름으로 세상의 적들을 향해 휘두를 것 같은 '칼의 노래'가. 그 두려움은 9일 KBS 1TV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인정치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왕실의 권위 회복을 외치며 '봉사 10조' 를 만들어 피의 칼을 거침없이 휘두르는 최충헌에게 문하시중 두경승은 이렇게 말했다. "내 지금껏 거병의 주동자들이 내세운 대의명분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한 것인지 보아왔네. 대체 그 자들이 내세운 대의란 것이 누구의 대의였단 말인가. 황실의 대의도 아니었고 백성들의 대의도 아니었네. 거병의 대의는 오직 권력을 움켜쥐고 정적들을 척살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였네."
물론 최충헌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결과는? 굳이 오래된 역사에서 찾을 필요도 없다. 박정희가 그랬고 전두환이 그랬다. 그들도 나라를 구한다며 버릇처럼 이순신을 높이 불렀고, 그들만의 '적'을 베었다. 제발 '칼의 노래'를 함부로 부르지 마라. 그 칼로 먼저 베어야 할 것은 적이 아니라, 자신임을 소설 '칼의 노래'에서 읽을 수 없다면. 무섭다.
/이대현 문화부장/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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