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트랙에 늦게 입문한 아들의 첫 경기 때 였다. 같이 뛰는 선수들은 초등학교 2, 3학년 때부터 쇼트트랙을 했고 아들은 중학교 2학년 때에야 시작했으니 만 1년도 안 되는 상태에서 경기에 나선 것이다.아들이 나선 3,000m 경기는 트랙을 스물 일곱 바퀴 도는 것이다. 선두와 두 바퀴 차이가 나면 중도 탈락이다. 선수들은 대개 열 다섯 바퀴 정도까지 서서히 달리다가 마지막 몇 바퀴를 남기고 속도를 높이는데 이 날은 한 선수가 두 번째 바퀴부터 치고 나간 뒤 나머지 바퀴 모두를 전력으로 달렸다. 아들은 네 바퀴를 남기고 선두와 두 바퀴 차이가 나고 말았다. 그리고 중도 탈락했다.
더욱 비참한 것은 탈락한 선수를 링크 중앙에 세워 놓는 것이었다. 네 바퀴가 남은 상태에서 선수들은 내 아들을 링크 가운데 둔 채 계속 달렸다. 순간 내 머리는 하얗게 진공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는 1988년 5월의 공원묘지가 떠올랐다.
배우로 데뷔하는 날이었다. 대사가 있는 세 장면에 출연하는, 비중 있는 단역이었다. 나는 조연 호스티스의 동생 역을 맡았다. 공원묘지는 호스티스 누나의 뒷바라지로 대학을 졸업하고 증권회사에 다니는 동생이, 암에 걸린 누나를 거들떠 보지 않다가 누나가 죽은 뒤에야 찾아가는 곳이었다. 이 장면에는 영화에 출연한 모든 배우가 등장했는데 여기에서만큼은 내가 주인공이었다. 첫 컷에서 나는 산 밑에서 묘지로 달려갔다. 감독은 너무 빠르다며 다시 달릴 것을 요구했고 나는 달리기를 일곱, 여덟 번 반복했다. 셔츠와 양복이 흠뻑 젖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묘지 앞에서 소리 내 엉엉 울었지만 감독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며 호통을 쳤다. "N.G…N.G…N.G." 감독의 입에서 욕설이 시작됐다. "저런 놈이 배우 한다니까 한국 영화가 이 모양이지. 누가 데려왔어?" 욕설은 삼십분 동안 계속됐다.
어렵게 촬영을 마쳤는데 목이 말랐다. 주위를 둘러보니 산소 옆 골짜기에 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마냥 허겁지겁 물을 마시고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젖은 양복을 입은 채 난 화창한 공원묘지를 터덜터덜 홀로 내려오고 있었다.
지금 내 눈앞에는 시합을 마치고 땀에 흠뻑 젖은 아들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나의 대답은 그저 미소일 뿐이다. 호된 신고식을 치른 아들에게 난 일인자가 되라고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스물 넷에 내가 겪은 것을 아들은 열 네 살에 경험했다. 나보다 십년 먼저 쓰린 아픔을 맛본 아들은 틀림없이 나보다 강하게 자랄 것이다.
우리 부자는 아이스 링크를 빠져 나와 말없이 걸었다. 아들의 발걸음은 공원묘지를 내려오던 나의 발걸음과 같을 것이다. 그 때는 나 혼자였지만 지금 아들 옆에는 내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난 잠시 쑥스러웠다. 나는 왜 아들 경기를 당당하게 지켜보지 못했을까 하고.
/조재현 영화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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