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형, 주말에 왜 연락이 되지않느냐는 이메일과 문자메시지가 와 있더군요. 사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로 잠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갑자기 왠 여행이냐구요? 글쎄, 꼭 무슨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뭐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 서면 번잡스런 일상사를 떨쳐버리고 그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 낯선 곳에서 낯선 풍경을 대하며 낯선 사람들과 수줍게 얘기하고 싶은 그런 감정, 그러면서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을 찬찬히 헤아려보고 싶은 심정…. 더구나 홋카이도는 제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마침 기회가 생겼기에 후배 눈치보지 않고 제가 손을 들었습니다. 일본 사람들도 가장 선호하는 여행지로 홋카이도를 꼽는다고 하죠. 사실 홋카이도라고 하면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도도(道都) 삿포르(札幌), 영화 '러브레터'의 무대인 오타루(小樽), 19세기 개항도시로 유명한 하코타데(函館) 등이 있는 중남부 지역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번 여행지는 우리에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동부쪽(도의 동쪽에 있다고 도동이라고 불립니다), 그 중에서도 쿠시로(釧路)시와 그 주변지역이었습니다. 현지인들이 '웅대한 자연과 풍부한 재료의 보고'라고 자찬하듯이 아직 사람들의 손때와 발때를 타지않아 북미와 중유럽에서 볼 수 있는 원시 대자연이 잘 보존된 곳이죠. 그래서 어땠냐고요? 한마디로 '참한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즐기고 가슴으로 느끼고 입으로 맛보고 귀로 감동하면서 여유로움을 찾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라면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았으니까요. 참, 풍광과 음식뿐 아니라 사람들의 소박함과 따뜻함도 빼놓을 수 없죠. 제철도 아닌 시기에, 그것도 고작 나흘 갔다와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고요? 분주한 성격인데다 모처럼의 나들이여서 제가 좀 '오버'한 것 같기도 합니다만 얘기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백문이 불여일견이긴 하지만….
● 쿠시로 가려면
홋카이도는 북위 41∼45, 동경 135∼145도에 걸쳐있는 일본 열도 최북단의 섬. 면적 8만3,500㎢로 일본 국토의 22%, 남한 땅의 80%에 이른다. 초록의 봄, 꽃의 여름, 단풍의 가을, 눈의 겨울 등 4계절의 변화가 뚜렷하면서도 장마가 없어 1년 내내 시원하고 쾌적하다.
삿포르 지역의 연중 기온이 영하 5도∼영상 20도인데 비해 쿠시로시를 포함한 동부는 영하 7도∼영상 17도로 한결 시원한 여름을 즐길 수 있다. 아직 사람의 손길의 거의 닿지않아 '일본 최후의 비경'을 자랑하는 최북서 반도의 시레토코 국립공원에선 한 여름에도 눈을 볼 수 있다.
인천공항에서 쿠시로까지 정기 항공편은 없으며 수시로 전세기가 오간다. 한진관광은 대한항공과 제휴, 올 여름(7월25일∼8월15일) 매주 일, 목요일 주 2회씩 왕복 7회 전세기를 띄울 계획이다. 원시림 체험 및 온천관광 3박4일은 129만원부터, 4박5일은 145만원부터. 골프 프로그램이 포함된 VIP코스는 200만원부터. (02)726-5621.
■천국만큼 아름다운… 神이 내린 선물
쿠시로 지역엔 크게 3개의 국립공원이 있는데, 그 중 아칸(阿寒) 국립공원이 으뜸입니다. 화산지대 특유의 산과 호수, 온천과 평원, 그 위를 노니는 야생동물과 새들이 곳곳에서 그림을 만들어내니 일일이 열거한다는 게 의미가 없죠. 하지만 주마간산 식이라도 읊어봐야 이른바 '필'이 오겠죠?
우선 쿠시로공항에서 서북쪽으로 버스로 1시간쯤 가면 부부 산인 오아칸다케(雄阿寒岳)와 메아칸다케(雌阿寒岳)로 둘러싸인 아칸호가 반깁니다. 원시림에 푹 파묻힌 호수는 아직도 얼음이 녹지않아 유람선이 제한적으로 운행합니다만 여름철에는 관광객과 낚시꾼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고 합니다. 특히 호수 한가운데의 섬에는 '마리모'라고 불리는 녹조류의 희귀 구상(球狀) 생물체 전시관이 있죠. 아직도 이 생물체의 형성과정은 수수께끼여서 '우주에서 온 선물'이라고도 불리기도 하는데 지름 20㎝ 정도의 크기가 되려면 700∼800년 걸린다고 합니다. 참, 활화산인 메아칸다케는 남편인 오아칸다케가 바람을 피우는 바람에 열받아서 머리에서 김을 뿜어낸다는 얘기도 전해집니다.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나요? 북쪽으로 속도를 좀 내죠. 일본 최대의 칼데라호이자 세계에서 가장 맑은 호수로 공인된 마슈우(摩周)호, 이 지역 최대 호수이자 수상레저의 천국인 쿳샤로(屈斜路)호, 화산활동을 계속하며 유황냄새의 수증기와 분연을 뿜어내는 이오우잔(硫黃山), 광활한 철쭉꽃밭을 옆에 두고 넓은 호수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가와유(川湯) 온천마을은 어느 한곳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합니다.
투명도에서 바이칼호를 제친 마슈우호는 흘러들어오는 강도, 나가는 강도 없는데 수위가 일정하며 연중 거의 안개에 덮여있어 신비감과 애잔함을 자아냅니다. 가슴속에 갖가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전망대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처연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볼 수 있죠.
쿳샤로호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비호르(美幌)고개는 꼭 얘기해야겠습니다. 뛰어난 미모와 호소력 넘치는 가창력으로 일본인들의 심금을 울렸던 '엔가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아시죠. 한국계로서 1989년 52세의 나이로 타계한 그녀의 유작곡 '강물의 흐름처럼'은 지금까지 일본인은 물론, 적잖은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데, 바로 그녀의 또다른 가비(歌碑)가 그 곳에 있더군요.
제목과 가사를 정확히 기억은 못하지만 대강 '사랑하는 사람을 잊기 위해 비호르고개에 올랐는데 쿳샤로호의 자욱한 안개 때문에 마음이 더욱 갈팡질팡하더라'라는 내용이었는데, 왜 있죠, 갑자기 가슴 한 켠에 휑한 바람이 지나가는 기분….
이젠 오호츠크해와 맞닿아있는 아바시리(網走)시에 갈 순서인데 최소한 겨울에 오호츠크해가 얼어붙는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죠. 이곳 유빙(流氷·바람이나 해류 등의 영향으로 표류하는 해빙)관에 가면 "참 멀리 왔구나"라는 느낌과 함께 유빙의 원리를 깨우칠 수 있어요. 유빙이 뭐냐고요, 빙산과 어떻게 다르냐고요, 바닷물이 왜 얼어붙느냐고요? 말이 길어지니 인터넷 지식검색에 가서 찾아보세요.
어쨌든 3월 이전에 아바리시를 방문하면 바다위의 얼음을 부수며 전진하는 쇄빙선 '오로라'를 타볼 수 있고 유빙을 이용한 다양한 레포츠를 즐길 수 있다네요. 중범죄자들을 수용하던 감옥을 그대로 보존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이곳 주민들의 지혜도 기억해둘 만하죠.
차를 타고 오호츠크해 연안을 따라가면 북서끝단이 바로 시레토코(知床) 반도입니다. 이곳 또한 국립공원으로 5개의 호수, 즉 5호가 유명합니다. 호수는 이제 좀 지겹죠? 다시 태평양 연안으로 가려면 우리나라의 한계령을 연상케 하는 시레토코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그곳에선 아직도 2∼3m 가량 쌓인 눈을 볼 수 있습니다. 눈이 그리우면 라우스다케(羅臼岳)를 배경으로 사진 한장 찰칵!
쿠시로 시내로 돌아가는 길에 2만1,000㏊에 달하는 일본 최대의, 그리고 최후의 자연 습지 국립공원인 쿠시로 습원(濕原)에 반드시 들러 트레킹을 해야 합니다. 갈대가 만드는 엷은 황색으로 칠해진 이곳은 계절마다 모습을 바꿔 봄에는 안개의 베일에 휩싸인 환상적 풍경을, 여름엔 오리나무가 만드는 신록의 조형미를, 가을엔 붉은 석양에 물든 홍색의 초원을, 겨울엔 태양빛을 받아 빛나는 설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강과 수목, 조류와 어패류가 풍부한 생태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습지를 관찰토록 한 유보도(遊輔道), 즉 떠있는 길도 눈길을 끕니다.
이 습원 동쪽편에 북쪽으로 뻗은 철도를 달리는 기차를 '노록코호'라고 합니다. 늦다는 의미의 일본어 '노로이'와 탄광열차 '토록코'를 합친 이름의 독특한 관광열차죠. 광대한 쿠시로 습지를 보는 시속 25㎞ 안팎의 여유롭고 소박한 기차여행은 다정다감 그 자체입니다.
쿠시로 습원 오는 길에 '목초지가 360도 전 방향에서 수평선까지 이어져 있어 수학적으로도 이해하기 힘든다'는 '900초원'(소를 방목하는 초원 넓이가 900㏊라는 것에서 연유)에 들러 홋카이도 동부의 광활함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죠.
H형, 너무 좋은 얘기만 늘어놔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요? 사실 시간만 좀 더 있었다면 레포츠 등 여러가지 체험도 하고, 좀 더 느긋하게 즐기며 심신을 충전하고 싶었는데, 너무 바삐 움직였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도동의 매력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다면 순전히 제 필력 탓이죠.
또 인구 17만명 안팎의 소도시인 쿠시로시의 관광 관계자들이 보여준 정성과 열정, 특히 한국인 관광 안내가 처음인데다 우리말 받침 '?' 발음이 안돼 내내 고생하던 모리야마 무츠코(森山睦子)씨의 진정한 마음을 전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미지의 세계에서 새로움을 맛보는 것 만큼이나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이 생활에 활력을 준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H형의 건강을 빌며 마지막 인사말은 영화 '러브레터'의 대사로 대신하죠. "오겡끼데스까? 와타시와 오겡끼데스."
/쿠시로(홋카이도)= 글·사진 이유식 기자
● 원주민 아이누족 마을
아칸호수 주변 온천가 서쪽엔 아이누(Ainu)족이 모여사는 마을이 있는데 중앙 광장에선 밤이 되면 화롯불을 피워 평화를 기원하며 평화를 위해 싸운 영웅을 묘사한 서사극 '유크라'를 공연한다. 유일한 민족악기 '뭇크리'의 선율로 손님을 끄는 토산품가게도 30여군데 있다. 광장입구엔 숲의 수호신이자 천연기념물인 시마후쿠로우(섬올빼미) 장식이 있다.
아시아 고종족(古種族)의 하나인 아이누족은 800년 전 홋카이도에 정착한 원주민으로 인종학적으로는 몽골계. 아이누는'사람' 을 뜻하는데 홋카이도 전체에 2만5,000명 정도가 있다. 그러나 19세기 말 명치 이래의 동화정책에 의해 인종적 특질과 고유의 문화를 대부분 잃어버려 아이누인이라기보다 아이누계 일본인이라고 부르는게 더욱 정확하다. 순종 아이누인의 피부는 검은 편이며 눈은 쌍꺼풀에 우묵하고 광대뼈가 나왔으며 귀가 비교적 크다. 남녀 모두 털이 많아 최다모(最多毛) 인종에 속한다.
● 먹을거리
홋카이도 동쪽 바다는 필리핀 남쪽에서 발생해 북상하는 난류와 북극권 베링해에서 남하하는 한류가 만나는 곳이어서 어느 곳보다 어종이 다양하고 풍부하다.
이곳의 수산물이 모이는 대표적인 곳은 쿠시로시의 전통시장 '와쇼이치바'. 여기서 꼭 맛봐야할 것은 '갓케동'(사진), 우리말로 '마음대로 덮밥'이다. 따뜻한 밥위에 취향대로 연어알(이쿠라) 게(카니) 성게(우니) 연어 참치 등 해산물을 얹어 고추냉이와 간장을 뿌려먹는 것인데 1,500엔 정도면 한끼를 너끈히 해결한다. 또 매년 10월부터 11월까지 홋카이도 동부연안에서만 잡히는 20㎝ 크기의 바다빙어 '시샤모', 속이 꽉 차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대게 '카니' 등은 이 지역의 대표적 특산품으로 꼽힌다. 값은 한국에 비해 20∼30%선. 아울러 단맛이 강해 바다의 우유라고 불리는 굴(카키), 기름기가 넘쳐흐르는 꽁치(산마), 일본내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연어 등의 신선도는 시장상인의 힘찬 목소리에서도 확인된다.
한편 해산물을 숯불에 구워먹는 이른바 로바다야키(爐端燒)의 원산지도 쿠시로 지역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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