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국회 개원일이 얼마 안 남았다. 벌써부터 총리는 누가 하느니 동반 입각을 하느니 분주하기 이를 데 없다. 여야 각 당은 국회 등원을 앞두고 당선자 연찬회 등을 열어 저마다 국민 앞에 새로운 다짐을 내놓고 있다. 상생의 정치를 하겠다거나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정치를 하겠다는 지극히 추상적인 다짐은 논외로 하고 "룸살롱에 안가겠다" "하루 5시간만 자겠다" 또는 "자전거로 등원하겠다"는 등 일부 당선자들의 각오와 결의가 눈길을 끈다.언론 보도를 통해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과연 그들의 초심이 얼마나 오래 이어질 것인지에 자못 관심이 모아진다. 우리는 유세 때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간곡히 호소하다가 일단 당선이 되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제 몫 챙기기에만 바쁜 의원들을 수도 없이 보아 왔다. 유형은 다르나 사회지도층의 솔선수범의 자세는 동서고금을 통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그 사회의 미덕이자 문화규범이 아닐 수 없다. 서양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 하여 고대 로마시대에 원로원 귀족들과 그 자제들이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전쟁터에 나아가 목숨을 바쳤으며 세금도 제일 많이 냈다. 중세 봉건시대에도 그러한 전통은 기사제도를 통해 이어져 왔다.
근세에 와서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특히 프랑스와 관련하여 자주 거론되는 것은 이 나라의 위정자들이 그러한 소임을 다하지 못해 세 차례나 혁명을 겪으면서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이 말이 국민들에게 무엇보다 어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30년 7월 혁명으로 부르봉왕가를 대신해 왕위에 오른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립이 초기에는 '시민왕'을 자처하며 일과 후 우산을 받쳐 들고 파리 시내를 산책하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자유주의적 행보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과 10여년 후에 다시 절대왕정으로 회귀하는 조짐을 보이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역으로 조선조 최고의 부자로 알려진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결은 우리식의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비결은 다름 아닌 그 집안 가훈에 있었다. 즉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르침이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가진 자의 나눔의 정신 또는 사회적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치권력이든 경제적 부든 사회지도층의 솔선수범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나 우선 일반 국민들의 눈에 가시적으로 비쳐질 수 있는 것은 17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다짐했다는 위의 생활준칙이 한 예가 됨은 물론이다. 여기서 핵심은 권력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이다.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유권자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대중 정치인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연전 필자가 스웨덴에 잠시 거주할 때 현지 한국대사관 직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신선한 충격으로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다. 스톡홀름 대사관의 한 한국 외교관이 주말에 차를 타고 외출하다 시내 교차로에서 신호대기를 하고 있는데 옆 차선에 차체가 녹슨 오래된 볼보차가 와서 멎었다. 그런데 무심코 운전자를 쳐다보았더니 어디서 낯이 많이 익은 사람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스웨덴 현직 총리였다는 것이다.
네덜란드나 스위스 등 서유럽 선진국에서는 의원들이 자전거 타고 등원하는 모습을 TV를 통해서도 흔히 본다. 이제 우리도 17대 국회에서는 지하철이나 버스, 자전거는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 인라인 스케이트나 보드웨이를 타고 등원하는 의원 모습까지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김경수 명지대 교육학습개발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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