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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손끝-한국의 장인들]<14> 두석장 박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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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손끝-한국의 장인들]<14> 두석장 박문열

입력
2004.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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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석장(豆錫匠 중요무형문화재 64호) 박문열(54)씨는 키가 작다. 150센티 정도나 될까. 그는 "어려서 옥수수죽만 먹어서 그렇다"고 했다. 3남 4녀 가운데 막내로 경북 경주시 황성동에서 태어난 그는 휴전 이듬해 목수였던 아버지를 잃고 다섯살 무렵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의 가족은 마포구 도원동 효창공원 인근에 있는 방공호에 터를 잡았다. 일어서면 어른들은 머리가 닿을 것 같은 키 낮은 방공호에서 어머니는 시장에 떡팔러 나가고 형과 누나들은 학교로 뿔뿔이 흩어지면 어린 그가 혼자 깡통을 들고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녔다. "당시에도 잘사는 집은 호사스럽게 살았지만 인심이 후하지는 않았다"는 그는 구호소에서 주는 옥수수죽을 타다 혼자서 방공호에서 먹었다.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지만 공부는 재미가 없었다. 그림만 좋고 만드는 것만 좋아서 남들이 버리는 크레파스를 쓰레기통에서 주워서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도 곧잘 상을 타곤 했다고 한다.

쇠붙이와의 인연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용산에 있는 주물공장에 들어가면서 이어졌다. 그는 일당 55원을 받고 주물공장에서는 쇳물 녹이는 일을 했다. 아동 노동을 단속하는 공무원이 나오면 창고에 갇히기도 하고 쇳물을 빼기 위해 끓어오르는 흙을 잘못 밟았다가 발이 부풀어 올라 신도 못 신고 맨발로 도원동까지 걸어온 적도 있었다. 지금도 잘 살진 않지만 그는 "여유있는 장인은 나태해지고 오히려 돈 벌 궁리를 하지만 가난한 장인은 돈 생각이 없기에 작품이 나온다"고 말한다.

두석이란 황동이나 주석을 부르는 옛말이다. 조선조 법전인 대전회통에 따르면 두석장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놋쇠로 장석을 만드는 장인을 일컷는다. 장석은 목가구나 나전가구의 몸체에 부착하는 금속장식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 옛날에는 동과 주석의 합금재를 사용하여 장식물을 만들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지만 조선시대에 이미 황동 백동 동은 물론 시우쇠(철을 일컷는 두석장의 용어)까지도 다 장석재로 쓰였다.

박씨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장석을 만든 기법으로 금속제 가구를 만들기도 한다. 전통 목가구의 비례를 살린 구조로 백골(나무 가구골조)에 백동이나 황동 금속판을 싸서 각게수리(금고)나 반닫이를 만든다. 또 전통 건축물의 철물작업까지로 두석장의 역할을 넓히고 있다. 부여 정림사지의 황동철물장석이나 양산 통도사 대웅전 금강계단의 비녀쇠 돌쩌귀, 안동 봉정사 대웅전의 등자쇠, 영광 불갑사 대웅전의 철물을 모두 그가 복원했다.

용산의 주물공장에서 호되게 일을 하던 그가 진짜 장석의 길로 들어선 것은 68년이었다. 어린 동생이 몸까지 상해가며 일을 하는 것을 안타까이 여기던 큰 누이가 시가쪽 인척인 윤희복(1931∼2002)씨를 소개해준 것이다. 윤씨는 당시 인사동에 공방을 두고 고가구의 장석을 만들고 있었다.

그곳을 찾아가니 시골부엌만한 방에서 윤씨 혼자 조그만 정으로 동판을 쪼고 있었는데 "이 정도라면 배울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합금이 된 황동이나 백동 재질을 사다가 작두로 잘라서 모양을 만들지만 당시만 해도 금속을 녹여 쇠까치(금속덩어리)를 만들고 이것을 망치로 두들겨 편 후 일일이 정으로 쪼아서 형태를 잘랐다. 정 종류도 많지 않아 이쑤시개보다 조금 크고 두꺼운 정 하나로 장석을 자르기도 하고 무늬를 새기기도 했다. 특히 평안도 박천에서 유래한 숭숭이 반닫이는 시우쇠를 일일이 정으로 쪼아 무늬를 투각시키는 작업이라 보통 어렵지 않았다. 장석에는 상감도 들어가니까 상감기술도 배웠다. 표면을 절반 정도 끌정으로 긁어내서는 날정으로 만든 글씨나 태극문양을 박아 넣는 면상감이나 쇠에 은선을 넣는 입사, 바탕을 투각한 후 글씨나 태극문양 같은 무늬를 집어넣는 박상감 등 기법은 오묘했지만 그는 일이 어렵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나면 인사동을 돌면서 전통적인 금속기명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선비들이 외출할 때 붓과 먹을 넣어다니게 만든 묵호, 금속연적인 필새니 먹상, 붓을 올려놓는 필가, 철연적 등 금속제품의 세계도 무궁무진했다. 그는 79년 홍은동에 전세 공방을 차리고 독립을 했다.

박씨의 장기는 숭숭이 반닫이 장석과 자물쇠이다. 그는 숭숭이 반닫이 장석으로 98년 전승공예대전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숭숭이 반닫이는 평안도 출신인 스승 윤씨에게서 솜씨를 물려받았다. 자물쇠는 인사동에서 일할 때 독학으로 익혔다. "우리 전통 자물쇠는 모양도 예쁘고 잠그는 방법이 기미묘묘한 것이 많다"는 박씨는 "솜씨좋은 도둑이 키박스(현대적인 자물통)는 열겠지만 전통 자물쇠는 건드리지 못한다"고 자신한다. 3단만 되어도 광두정(단추 모양의 자물통 걸쇠)을 올려야 열쇠 들어갈 자리가 나타나는데다가 열쇠를 시계방향과 역방향으로 잇달아 돌려야 열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통 자물쇠는 7단까지 있다. 박씨는 "지금 장인은 옛날보다 재료나 공구가 낫기 때문에 이걸 연구개발해서 10단까지는 가야 조상한테 면목이 선다"고 말한다. 현재 8단까지 완성했는데 "단수만 높이는 게 아니라 기능성이나 장식성을 높여가며 만들어야 하기에" 작업이 더디다.

그가 본격적으로 자물쇠 복원에 나선 것은 90년 무렵부터이다. 전통가구에 달리는 것은 기역자로 구부러진 쇳대 를 넣어서 고삐를 빼는 2단 자물쇠가 보통이다. 가구가 미려해지면 자물쇠도 정교해진다. 7단 자물쇠는 진주의 장석수집가인 태정 김창문(1922∼2003)씨가 소장한 것이었다. 79년부터 매년 장석 관련 유물을 한 종류씩 재현해서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하던 박씨는 92년 자물쇠를 주제로 삼고 김씨가 설립한 사립 박물관인 태정박물관으로 찾아갔다. 장석만을 따로 모아 수집하던 김씨라 원래의 가구는 볼 수 없었고 자물쇠만 남아있었다. "처음에는 보여주지도 않으려고 했어요. 담배도 사들고 자주 찾아갔더니 보여주기는 했는데 사진도 스케치도 안 된다고 하더군요." 일본인이 700만원을 주겠다고 했는데도 안팔았다는 자물쇠였다. 김씨는 자물쇠를 열어서 다시 끼워보고는 개폐 방법과 쇠의 두께를 머릿속에 입력했다. 그 길로 터미널로 달려가서는 그림을 그리고 서울로 오자마자 공방으로 직행했다. 사흘동안 침식을 잊고 7단 자물쇠를 재현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치수는 다 맞추었는데도 쇳대가 자물통의 구멍 안으로 들어가지를 않았다. 다시 시도하기를 여러 차례. 마침내 그는 무릎을 쳤다. 쇳대를 45도 각도로 구부려야 안으로 들어가게 설계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해서 완성한 7단짜리 자물쇠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전통 자물쇠의 재현으로 그는 93년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체육부 장관상을 받았다.

지금까지 그가 만든 자물쇠는 이루 셀 수가 없다. 이제는 "어떤 자물쇠든 겉모양만 보면 내부구조가 머릿속에 그려진다"고 했다. 대전의 과학관에는 그가 만든 3단에서 7단까지 40여종의 전통 자물쇠가 전시돼있다. "자물쇠는 조선시대 과학의 백미"라고 그는 강조했다. 부여 정림사지 철물을 복원할 때는 4킬로그램이나 하는 자물쇠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그는 작년부터 경기 벽제로 작업실을 옮겼다. 홍은동 시절, 그는 새벽 4시에 공방으로 출근해서는 오전 9시까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9시부터는 밥벌이가 되는 장석일을 했다. 지금도 서울 마포에 있는 집에 가지 않고 벽제의 콘테이너 공방에서 주로 기거하면서 잠이 깨면 일어나 주물을 두드리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가끔 눈이 시리면 밖에 나가 텃밭을 살피는 것이 유일한 여가생활이다. 주 수입원인 목조가구에 붙이는 장석일은 주문이 오면 하고 시간만 나면 자물쇠를 만지니 자물쇠 제작이 그에게는 취미이자 업인 모양이다. 전통 자물쇠란 자물쇠는 다 보고 신기한 것은 그대로 재현해보는 게 꿈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자물쇠는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청동제라고 알고 있는데 열람도 할 수 없었다. "겉모습만 봐도 좋겠는데"라고 아쉬워하는 박씨는 "내가 자물쇠를 열심히 만든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인연이 닿을 것"이라고 마음을 달래고 있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자물쇠의 정교함 고삐 겹수에 좌우

자물쇠는 크게 굽통과 고삐, 쇳대 세 부분으로 나뉜다. 굽통은 외형으로 드러나는 전체 몸통을 가리키며 고삐는 굽통속에 밀어넣는 조임쇠 부분이다. 쇳대는 열쇠이다. 자물쇠의 정교함은 고삐가 몇 겹이냐에 크게 좌우된다. 고삐는 가장 위에 있는 중심축을 줏대라고 하며 쇳대와 맞물려 개폐여부를 결정짓는 부위를 살줏대라고 한다. 살줏대의 끝은 연꽃모양이라고 하여 연봉으로 부른다. 또 3단 이상의 자물쇠에는 굽통에 단추모양의 볼록한 광두정(호로라고도 부른다)이 달려있는데 살줏대를 조이고 있다가 밀어올리면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7단 자물쇠 열기

1. 전면의 광두정을 누른다.

2. 고삐를 앞으로 민다.

3. 밑면 광두정 2개 중 하나를 앞으로 민다.

4. 뒷부분이 회전하여 움직이면서 홈파진 부분을 맞춘다.

5. 열쇠끝을 45도로 기울여 구멍에 댄 후 비틀어 넣는다.

6. 열쇠를 비튼 상태에서 밑으로 내린다.

7. 열쇠를 수평상태로 하여 앞으로 밀어내면 고삐가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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