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KBS 사장이 돼서 새로 시작한 것 중 하나가 시청자와 직접 대화하는 방송이었다. 그 전까지는 방송의 토론 프로그램이라면 대개 정부에 가까운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시원한 토론이 없어 시청률이 저조했다. 실무진에게 물어보니 출연자 교섭이 매우 어렵고 새로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 지 안심이 안 된다고 했다.그래서 나는 '심야토론'의 토론 주제나 출연자를 고르는 5인위원회를 이한빈(李漢彬) 전 부총리 등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인사들로 구성했다. 또 '원로와의 대화'도 신설했다. 지역별로 영향력 있고 존경 받는 원로들 중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만한 분들을 출연시켜 대담하도록 했다. 내가 직접 출연자를 골랐는데 서암(西庵) 스님과 강원룡(姜元龍) 목사, 서예가 현중화(玄中和)씨와 양순필(梁淳泌) 제주대 사범대학장, 이을호(李乙鎬) 다산학회장과 홍남순(洪南淳) 변호사, 원로시인 구상(具常)씨와 설창수(薛昌洙)씨 같은 분들이었다.
그런데 과거에 해오던 것을 내가 하지 않은 것도 있다. 과거 KBS 사장들은 청와대 관계관이나 주무장관과 골프회동이나 회식을 많이 했다. 당시 나는 골프를 비판하던 때라 골프 회동은 물론 저녁식사 한번 안 했다. 최병렬(崔秉烈) 문공부 장관과는 코리아나 호텔 3층 일식집에서 최창봉(崔昌鳳) MBC 사장과 같이 한번 식사를 한 것이 전부다. 강원룡 위원장을 비롯한 방송위원들과는 용산 역전에 있는 '성원(盛原)'이라는 한식집에 본부장들을 대동하고 가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 때 1인당 식사비가 16만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튿날 아침 회의에서 "전에 그런 곳을 많이 다녔는가"라고 물으니 본부장들이 "그전에는 거의 매주 다녔죠. 그렇게 해야 청와대나 공보처와 협조가 잘 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곳에 자주 다니면서 어떻게 좋은 방송을 만들 수 있는가. 검소와 절약도 KBS가 모범이 돼야 하지 않는가"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잘 한 것인지, 잘 못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상도르 에트레 초대 주한 헝가리 대사의 초청으로 헝가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 KBS는 TV 3개, 라디오 8개 채널로 방송량이 세계에서 제일 많았다. 그곳에 가서 들으니 헝가리는 88서울올림픽을 통해 우리나라의 발전상을 알게 돼 놀랐다고 했다. 내가 다녀온 뒤 헝가리 국영방송 사장이 한국을 방문했고, 그가 다리를 놓아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헝가리 방문이 이루어지게 됐다.
취임한 지 1년 정도 지나자 나도 업무에 익숙해졌고 KBS의 신뢰도나 인기도 높아졌다. 그런데 노조가 좀 과격하게 정부를 비판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오랫동안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억압당한 데 대한 반동이었다. 1989년 가을 김영삼(金泳三), 김종필(金鍾泌)씨가 이끄는 두 야당이 민정당과 합당해 정국이 여소야대로 변했고 정부의 입장이 강경해졌다. 처음에는 MBC에 경고가 몇 번 갔다. 11, 12월께였다. 앞서 말한 최창봉 MBC 사장, 최병렬 문공부 장관과의 회식 자리에서 최 장관이 "방송이 너무 정부에 대해 비판적"이라며 "그대로 나가면 가만 안 있겠다"고 최 사장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나한테는 "잘 부탁한다"고만 했다.
연말에 1년 수지를 맞춰보니 60억∼70억원 가량 흑자가 났다. 그 때 KBS 직원들의 봉급이 MBC의 70% 정도밖에 안 됐다. 내가 사장으로 받는 돈은 한 달에 월급 200만원, 판공비 100만원, 업무추진비 100만원을 합쳐 총 400만원이었다. MBC 사장은 700만원 정도로 2배 가까이 됐다.
취임 초기에는 적자라 과장 이상 간부들에게는 특근비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노조에서 연말 특근비는 특근을 했든 하지 않았든 모든 사원들에게 줘야 한다면서 17일분을 달라고 요구해왔다. 노사 협의를 거쳐 주기로 했다. 명목은 연말연시 특집 준비에 따른 특근비였지만 사실은 연말 상여금을 겸해 인센티브로 준 것이다. 이사회에서 총 17억원으로 결정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이것이 말썽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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