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선동열 수석코치는 요즘 속이 시꺼멓게 타 들어간다. 속절없이 무너지는 마운드 때문이다. 다 잡았던 경기를 날려버리기 일쑤여서 얼굴 들기조차 민망하다. 초라한 방어율(5.17·6위)과 맞물려 팀은 최근 4연패, 5위로 추락했다.사정은 다른 구단도 마찬가지. 4∼5점차 리드를 잡아도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춤추는 방망이 덕에 종료 사이렌이 울리기 전까지는 아무도 승패를 예측할 수 없다. 올 시즌 극심한 타고투저(打高投低)가 불러온 기현상이다.
방망이가 커졌어요
올 시즌 프로야구는 그야말로 타자들의 잔치다. 전체 홈런수는 272개(11일 현재). 지난해 같은 기간(204개)에 비해 32%나 급증했다. 전체 팀 타율은 2할7푼5리로 지난해 같은 기간 2할5푼3리에 비해 2푼2리나 껑충 뛰었다. 10점 이상 점수가 난 경기만 33번(3.75경기 당 1번 꼴)이나 된다. 하루(4경기)에 적어도 한 구장에서는 핸드볼스코어가 났다는 이야기다. 승부가 뒤집어진 경우도 지난해 37경기에서 올해는 56번으로 비교가 안 된다.
투수의 수난시대다. 불방망이를 피하려다 보니 693개에 불과하던 볼넷은 1,000개 가까이(987개) 치솟았고 팀 완봉경기 숫자도 23에서 7로 쪼그라들었다. 방어율도 3.72에서 4.86으로 급상승했다.
반쪽의 재미
화끈한 타격전이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올 시즌 평균 경기 시간은 3시간 13분. 빠른 경기 흐름을 위해 각종 스피드업 규정을 두었지만 지난해(3시간13분)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이닝제한(11회)이나 시간제한(4시간)에 걸려 승부를 가리지 못한 경우는 8경기(지난해 5경기)나 된다. 자연히 그라운드에는 점차 팽팽한 긴장감이 사라지고 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투수전의 묘미도 잊혀지고 있다. 105개의 폭투(지난해 94개)와 188개의 실책(지난해 176개)이 난무하는 등 경기 수준도 떨어졌다.
적자생존의 법칙
타고투저 현상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타자는 진화를 거듭해 강해진 반면 투수들은 퇴화했다'는 분석이다. 타자들은 아시아 홈런왕과 연속 경기 안타기록을 세우는 등 신천지를 개척하는 사이 1993년 만해도 18명이나 되던 방어율 3.0 이하 투수 숫자는 지난해 0으로 멸종됐다.
2년 전 일본에서 뛰다 복귀한 정민태(현대)는 타구에 체중을 싣는 국내 타자들의 향상된 파워와 스피드에 깜짝 놀랐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실제로 국내 타자들은 방망이를 놓으면 바벨을 들 만큼 웨이트트레이닝에 땀을 쏟는다. 홈런선두 박경완(SK)은 팀내 체력단련실에 들어가면 2∼3시간씩 나올 줄을 모른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해 강도 높게 근력을 다져온 심정수(현대)의 팔뚝은 불과 3∼4년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굵고 단단해졌다.
이에 비해 투수들은 상대적으로 체력훈련 등 자기 개발에 관심이 덜한 편이다. 삼성 박흥식 코치는 "근육에 무리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 투수들은 웨이트트레이닝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런 차이가 마운드 약화를 초래했다"고 말했다.
박노준 SBS해설위원도 "파워를 키우고 철저한 투구분석을 통해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들과는 달리 투수들은 새로운 구질이나 투구패턴을 연구하지 않다 보니 힘과 기량에서 타자들에게 밀릴 수 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박 위원은 투수들이 특히 제구력이 떨어지고 결정구가 부족해 투스트라이크 이후 안타를 얻어맞는 경우가 많은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단풍나무 방망이의 위력
여기에 국내 타자들이 장착하고 있는 '신무기'도 한몫 했다. 요즘 타자들은 기존의 물푸레나무(화이트애시 아오다마) 대신 훨씬 단단한 단풍나무 재질의 방망이로 바꿨다. 반발력이 좋은 단풍나무의 위력 때문인지 장타율은 역대 최고 수준인 4할2푼8리의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투타의 좌우균형이 무너진 점도 한 요인이다. 현재 타격랭킹서 1∼5위까지 좌타자들이 독식하고 있다. 반면 올 시즌 3승 이상을 올리고 있는 17명 중 좌완은 두산의 레스와 LG와 SK의 동명이인인 이승호 등 5명에 불과하다. 대형 투수의 부재 속에 좌완 투수들마저 제대로 힘을 못쓰면서 천적 관계인 좌타자들이 득세하고 있는 형국이다.
윤석환 두산 코치는 "스트라이크 존을 높이면서 투수들이 큰 것으로 연결되기 쉬운 높은 곳으로 던지는 경향이 많아졌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김병주기자 bj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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