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가장 사랑하는 외국인' 언더우드 집안이 오는 가을 한국을 떠난다. 4대에 걸친 이 미국인 목사집안의 봉사, 혹은 공헌이 119년 만에 대미를 맞는 것이다. 이 집안의 내방은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3년 미국의 한 신학교의 선교 지망생들은 '은자(隱者)의 나라' 조선에 관한 우울한 얘기를 들었다. 지난해 문호가 개방되었으나 시기상조를 내세우며 아무도 복음을 전파하러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년 뒤인 부활절 아침, 언더우드는 마침내 감리교의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조선에 개신교 선교사로서 첫발을 디뎠다. 총명하고 불 같은 정열을 가진 26세의 청년이었다.■ '조선에는 종교가 없고, 종교적 기질마저 없는 듯하다.' 영국 여성학자 이사벨라 비숍은 기독교가 수용되기 이전 조선의 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언더우드 목사가 서울에 온 2년 후에도 신자가 70여명으로 늘었으나 교회는 없었다. 언더우드는 그해 9월 서울 정동의 자기집 사랑방에 14명의 신자를 모아 정식 예배를 드림으로써, 새문안교회를 출범시켰다. 기독교가 우리 문화에 미친 가장 큰 공헌은 근대문화의 초석이 될 한글성서번역과 한글사용을 선도하고 대중화한 점이다. 조선의 새벽을 깨우는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이다.
■ 언더우드는 또한 경신중고와 연희학원을 설립하여 신교육의 터전을 닦았다. 그는 광혜원에서 근무하던 여의사 릴리언스 호튼과 결혼하여 의주까지 함께 전도여행 겸 신혼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가깝게 지냈던 고종은 그를 사석에서 '형'이라고 부르는 파격을 보였다고 한다. 이 부부는 기독교와 서양문화를 앞장 서 도입함으로써, 우리 근대문화 전반을 크게 성숙시켰다. 자칭 '연희 원(元)씨'인 이 집안은 4대에 이르도록 교육과 군복무 등은 미국에서 마친 후, 대부분 연세대 교수로 근무하면서 한국에 혈육 같은 애정을 보여 왔다. 가족묘지도 서울 양화진에 있다.
■ 언더우드 집안과 한국과의 아름다운 인연이 다 되어간다는 엄연한 사실은 몇 년 전부터 예고돼 왔다. 4대인 원한광 한·미교육위원회 위원장은 가을께 자식들과 함께 플로리다주에 정착할 계획이다. 그는 "떠나더라도 우리가족이 한국에 뿌린 보람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풍운의 개화기에 시작돼 일제의 압박, 국토분단 속에서도 자자손손 한국에 교육과 종교의 아름다운 씨를 뿌려 온 인연은 특이하고 귀중하다. 언더우드 집안의 헌신에 감사하며, 멀리 있어도 인연은 새로운 모습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박래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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