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의 이라크인 포로학대는 일과성인가, 우월주의에서 나온 체질화한 잔인성인가. 전세계를 공분에 떨게 한 최근의 추악한 포로학대 사건은 이라크전 명분이었던 인권과 민주주의를 송두리째 짓밟은 행위라는 점에서 미국이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 잇따라 전쟁을 벌인 와중에 노출된 인권침해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테러피습 직후 미 국민은 '전시 지도자'를 자임한 조지 W 부시 대통령 밑에서 똘똘 뭉치는 듯 했으나 이제는 안보라는 구실 아래 자행하는 정부의 무차별적인 감청과 시민권 제한에 점점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미국 민주주의의 골간인 법치주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기본권 부정하는 애국자법
미국 정부는 9·11 직후인 2001년 10월 26일 수사당국에 전화나 전자우편 등에 대한 광범한 감청을 허용하는 '애국자법(Patriot Act)'을 통과시켰다. 131쪽에 달하는 이 법은 적법한 절차 없이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자'를 무기한 체포, 구금할 수 있도록 했다. 일부 의원들이 지적한 대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포기한' 이 법률에 의해 수천명에 이르는 중동계 이민자들이 철퇴를 맞았다.
테러의 충격속에 통과된 애국자법은 그러나 지금은 전국적 탄핵의 대상이 됐다. 미국 수백여 중소도시들과 사회단체들은 애국자법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존 애쉬크로프트 법무부장관과 로버트 멀러 연방수사국(FBI) 국장을 상대로 한 소송이 잇달아 제기됐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오히려 한발 더 나가 지난해 판사나 대배심의 승인 없이 용의자나 증인을 소환할 수 있도록 하는 일명 '애국자법 2'를 추진해 반발을 샀다. 이 법안에 따르면 종교단체나 사원 등은 테러와 관련됐다는 증거가 없어도 당국의 수사대상이 될 수 있고 영주권자라도 법무부장관의 판단에 따라 일체의 증거나 기소절차 없이 추방할 수 있도록 했다. 애국자법에서는 외국인에 국한했던 개인의 인터넷 기록 및 전화내용 도청도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도록 강화됐다.
관타나모는 미국 인권유린의 현장
쿠바 관타나모 기지에 수감된 '불법전투원(unlawful combatants)'에 대한 인권유린은 미국의 추악한 인권 불감증을 국제사회에 각인시켰다. 600여 명에 이르는 포로들은 변호인 접견권이나 재판받을 권리와 같은 기본적 권리를 박탈당한 채 기약 없는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내세우는 논리는 포로들이 미국 시민이 아니고 미국이 아닌 쿠바 영토에 수감돼 있기 때문에 미국 법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관타나모 수감자들을 제네바 협약의 보호 대상인 '전쟁포로'가 아닌 전범으로 몰고 있고 이를 위해 관타나모 기지의 애매한 재판관할권을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 법원은 정부의 논리에 제동을 거는 의미 있는 판결을 잇따라 내놓았다. 샌프란시스코 항소법원은 "행정권의 기본권 유린을 막아야 한다"며 포로들에게 변호사 접견권과 미국 재판을 받을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대법원도 지난달 관타나모 포로들에 대한 무기한 억류조치의 합법성을 따지기 위한 심리를 시작했다.
포로들에 대한 가혹행위도 드러났다. 법무부 감찰당국의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 교도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성 수감자들을 알몸수색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등의 정신적, 신체적 학대가 자행됐다.
국제앰네스티(AI)는 "미국이 벌인 테러와의 전쟁이 세계를 더 위험하고 억압적으로 만들어 인권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며 관타나모 기지에서의 아프간 포로 불법감금을 대표적 사례로 지목했다.
외국 정부와의 마찰 불씨로
기본권을 무리하게 제한하는 미국 정부의 조치는 곳곳에서 외국 정부와의 마찰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미국은 올 1월부터 미국과 비자면제 협정을 체결한 일본, 유럽 등 27개국을 제외한 국가 출신 입국자에 대해 공항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지문을 채취하는 등 입국심사를 대폭 강화했다. "날인된 지문이 여권 지문과 일치하는 지 확인함으로써 테러범이 입국하는 것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것"이란 게 당국의 설명이지만 입국자의 생체기록 등이 당국에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의 거센 반발을 초래했다.
이에 항의해 브라질 정부는 브라질에 입국하는 미국인만을 대상으로 미국이 하는 것과 똑 같은 조치로 보복, 양국간 마찰이 시작됐다. 중국 정부도 지난달 베이징(北京) 주재 미국 대사관이 미국에 가려는 중국인들에게 지문날인을 받기 시작하자 대응조치로 중국에 입국하는 미국인에 대한 비자발급 규정을 강화했다.
인권과 도덕에 앞서 테러 척결을 우선하는 미국 정부의 외교정책이 세계 민주주의에 역행하고 독재를 공고하게 하는데 이용되는 사례는 이밖에 부지기수다. 러시아 정부가 체첸 공화국의 분리주의 반군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중국 정부는 북서부 신장(新彊)성 이슬람 교도를 끊임없이 박해하는데도 국제사회가 침묵하는 것은 도덕성을 잃은 두 얼굴을 가진 미국이 전 세계에 확산시키는 비극의 일부분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이라크 학대파문은 필연"
이라크 포로학대는 한국전 당시의 노근리, 베트남전에서의 밀라이 양민학살 사건 등을 떠올리게 하면서 '세계 경찰'을 자처하는 미군의 이미지에 먹칠을 했다.
이라크 포로학대 사건은 단순히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 마비때문이 아닌 미군의 중대한 결함에 의한 것으로 해석된다. 수용소 관리 등 후방지원 체제의 취약성과 사병의 군율 이완 등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는 것이다.
포로심문을 주도한 중앙정보국(CIA) 등의 법 절차를 무시한 편의주의도 사태를 악화시켰다. 포로심문 및 정보수집 업무를 사설 보안업체에 위탁할 만큼 미군의 전쟁수행 능력에 약점이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미군은 '야전교범(FM) 34―1' 등에서 포로심문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포로에 대한 모든 종류의 폭력, 정신적 고문, 위협, 모욕, 비인간적 대우는 금지된다. 심리적 심문기법이 허용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폭력·비억압적 방법에 국한된다.
뉴욕타임스는 9일 이라크전에 파견된 미군 헌병부대가 전혀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실무에 배치됐다고 보도했다. 포로학대가 대량으로 저질러진 바그다드 교외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를 관할한 320 헌병대대가 대표적 경우다. 부대원 중에는 파병 직전까지 맥도널드 가게에서 일하던 사람도 있다. 이들은 교도소 관리업무 등에 대한 사전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들은 또 헌병 6명이 포로 700명을 하루 16시간 감시하는 등 높은 긴장상태에 시달렸다. 포로로부터 정보를 얻어 내라는 지휘관들의 독촉은 스트레스를 한층 높였다.
9·11 테러 이후 포로심문과 같은 민감한 업무를 대거 사설보안업체에 이전한 국방부 정책은 포로 인권의 사각지대를 만드는 결과를 불렀다. 미국 볼티모어선지는 4일 보안업체 직원의 법적 위치가 매우 모호, 이들의 인권탄압 행위는 처벌하기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라크 포로학대와 관련, 현재 미국의 2개 보안업체가 조사를 받고 있다. 보안업체 직원들은 대부분 CIA 요원들과 함께 포로심문 및 정보수집·분석 업무를 수행했다. 보안업체 직원은 심지어 심문기법을 교육받지 못한 헌병들에게 "심문에 적절한 조건을 만들라"며 가혹행위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점에서 포로학대 사건은 안팎이 다른 미 인권정책의 양면성과 전투부대의 효율 강화에만 초점을 맞춘 미 국방정책이 빚어낸 결과로 볼 수 있다.
/배연해기자 seapow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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