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다/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 리면/ 가루 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초토의 시8―적군묘지 앞에서'에서)'명상과 구도의 시인'은 이렇게 죽음을 노래했고,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넋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50여 년이 지난 11일 자신도 그 너그러운 죽음 속으로 들어갔다. 끝내 고향을 다시 찾지 못한 채.
시인 구상의 고향은 함남 문천. 서울로 이사와 네 살 때까지 자라다 원산 가까운 덕원으로 돌아가 성장했다. 가톨릭 신자인 부모와 사제가 된 형 등 독실한 천주교 가정에서 시인은 열 다섯 살에 사제가 되리라 마음 먹고 성베네딕도수도원 부설 신학교에 들어갔다 3년 만에 세상으로 돌아왔다. 중학교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도 퇴학을 당하는 등 방황하는 10대를 보낸 그는 고향을 떠나 공사장 인부와 야학당 교사 등으로 떠돌다 일본 도쿄(東京)로 가 니혼(日本)대 종교학과에 들어갔다.
1941년 니혼대를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북선매일신문(北鮮每日新聞) 기자로 활동하면서 해방 이듬해 동인지 '응향(凝香)'에 시 '밤' '여명도' '길'등을 발표, 시인이 됐다. 공산치하 원산에서 선보인 그의 시들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부터 '퇴폐주의적, 악마주의적, 부르주아적, 반(反)역사적, 반(反)인민적'이란 비판을 받자 월남했다.
남으로 내려와서는 잡지 '백민(白民)'에 '발길에 채인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 '사랑을 지키리' 등을 발표하는 한편 연합신문 문화부장, 한국전쟁 종군기자단 부단장, 승리일보 주간, 영남일보 편집국장,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언론인으로서 구상의 삶은 한국현대사와 뗄래야 뗄 수 없다.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다 투옥됐고, 장면 정부의 입각 제의와 5·16 쿠데타 후 박정희 대통령의 대학 총장직 제의도 뿌리쳤다. 언론계를 떠난 뒤로는 서강대, 서울대 등에서 강의했다.
그는 평소 "목적을 위해 시를 써서는 안 된다. 내 시는 몸소 체험한 고민과 고투의 과정을 거쳐서 얻은 진실"이라고 말했다. 그의 시의 한 축은 현실인식이고, 다른 한 축은 기독교적 존재론이었다. 현실의 부정과 불의를 담되 그것이 기독교적 참회로 귀결되었다. 그의 시는 또 한국 건국신화, 전통문화와 선불교적 명상, 노장사상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정신세계를 수용하면서 이 모두를 기독교적 구원의식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한국전쟁 이후 발표한 대표 시집 '초토의 시'(1956년)는 전쟁의 고통을 노래하면서도 그것을 넘어 구원의 세계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후에도 시집'말씀의 실상''드레퓌스의 벤치에서', 수상집'침언부언(沈言浮言)''영원 속의 오늘', 희곡집 '황진이'등을 냈다.
투병 중이던 지난해 10월 장애인 문학지'솟대문학'에 2억원을 쾌척하는 등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데도 힘썼던 그는 당시 '한국문인'10·11월호에 발표한 유언으로 일찌감치 마지막을 준비했다."영원이라는 것은 저승에 가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큰 착각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늘이 영원 속의 한 표현이고 부분이고 한 과정일 뿐입니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金추기경 등 각계 조문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성모병원에는 각계 인사들이 찾아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조화를 보내왔고 김수환 추기경, 서영훈 전 적십자사 총재, 박삼중 스님, 이한택 주교를 비롯해 시인 문덕수 김남조 김광림 성찬경 신달자씨, 문학평론가 구중서(장례위원장)씨 등이 빈소를 찾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아주 소중한 분이었다. 좁은 의미의 가톨릭이 아니라, 종파를 넘어 세계를 아우르는 의미로서의 가톨릭 시인이었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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