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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코드 2004/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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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코드 2004/이순신

입력
2004.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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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새로운 문화코드로 부활하고 있다. 1970년대 독재체제 하에서 국가와 민족에 절대적 충성을 바친 영웅으로서 화려한 조명을 받았던 이순신이 2004년 지금 고뇌하는 평범한 인간, 개혁정치의 표상, '불패신화'를 이룩한 리더십의 화신으로 드라마, 오페라, 만화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다. 2001년 김훈씨의 소설 '칼의 노래'가 나온 이후 최근 문화계에 불고 있는 '이순신 열풍'을 점검해본다.

문학·출판

이순신 열풍에 불을 댕긴 김훈(56)씨의 장편소설 '칼의 노래'는 정유재란 중 이순신의 인간적 고뇌를 그린 작품. 2001년 4월 출간돼 지금까지 40만부, 대통령 탄핵 이후인 최근 두 달 사이에만 7만부가 팔렸다. 김탁환(36)씨의 소설 '불멸'(전8권)도 6월 초 새로 발간된다.

이순신의 삶을 축으로 16세기 조선사회를 그린 이 소설은 1998년 나왔던 것을 작가가 전면 개작, 기존 작품의 2배가 넘는 분량으로 낸다. 이순신의 리더십을 탐구하는 실용서와 일대기를 새롭게 조명하는 평전도 잇달아 나올 예정이다. 실용서로는 김용하 순천향대 교수의 '불멸의 리더십'(가제·황금가지 발행)이 7월 초 나온다.

이순신이 좌절과 역경을 이겨내고 불패신화를 쌓을 수 있었던 비결이 포용적이면서도 감성적인 리더십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지난해 11월 '이순신 경영학'으로 화제를 모은 지용희 서강대 교수는 '경제전쟁시대 이순신을 만나다'(디자인하우스 발행)를 냈다. 평전도 여러권 선보인다. 김탁환씨와 '이순신 폄훼' 여부 논쟁을 벌인 소설가 송우혜씨는 각종 고문서 등을 토대로 쓴 '이순신 평전'을 상반기 중에 낸다. 김태훈 한국은행연합회 차장은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가는 것부터 순국할 때까지의 과정을 징비록, 조선왕조실록 등을 토대로 새롭게 파헤친 '이순신이 있었다'(가제·창해 발행)를 낸다. 정두희 서강대 교수는 이순신의 승리가 동아시아 전쟁사에서 갖는 의미를 추적하면서, 당시 복잡한 정치사까지 종합적으로 연구한 결과물을 2006년께 발표할 예정이다.

드라마

KBS는 지난달 22일부터 김훈씨의 '칼의 노래'와 김탁환씨의 '불멸'을 원작으로 한 100부작 대하 사극 '불멸의 이순신' 촬영에 들어갔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 14일부터 방송될 예정인 '불멸의 이순신'에는 350억원이라는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된다. 해상 전투를 실감나게 담기 위해 거북선과 전함도 실물 크기로 재현한다. 충무공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가미한다. 노량대첩에서 충무공이 왜군의 총탄에 맞아 숨지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되는 드라마는 그의 죽음을 둘러싼 다양한 추측이 가능하도록 이야기가 전개된다. 안으로는 조정, 밖으로는 왜군과 명(明)에 포위된 한 인간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가설을 제기, 논란이 예상된다.

영화

싸이더스가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한 SF사극 '천군'(감독 민중기)을 준비하고 있다. '천군'은 미래의 한국군이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 무명의 젊은이에 불과했던 이순신을 훈련시킨다는 내용. 어느날 이순신 앞에 불쑥 나타난 서너 명의 무관이 바로 천군(天軍)이다. 제작사측은 "실제 이순신에 관한 옛 기록에는 이순신이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용맹해졌다'는 기록이 있다"며 "그 이유는 없으나 우리는 이 점에 착안해 영화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배우 박중훈이 이순신 역을 맡았으며 내년 초 개봉할 예정이다.

만화

이순신 열풍은 어린이들에게까지 번지고 있다. '만화 칼의 노래'(아이세움 발행) '불멸의 영웅 이순신'(웅진닷컴 발행) 등 2종이 나왔다. '만화 칼의 노래'는 김훈씨의 동명소설, '불멸의 영웅 이순신'은 작고한 작가 박종화의 '이순신'을 각각 원작으로 했다. 4월말 출판됐는데도 벌써 재판 인쇄에 들어갔다. 5월에는 반디출판사가 김탁환씨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10권 짜리 '불멸'을 내기로 하는 등 출판사 15∼20여 곳이 이순신 만화를 준비중이다.

오페라

성곡오페라단이 8월 13, 14 일 한전아트홀에서 오페라 '이순신'을 공연한다. 러시아의 알렉산더 아가포니코프 작곡, 알렉산더 슈우도르프 연출로 올린다. 98년 초연 이래 30여회 국내외 공연을 하면서 여러 차례 작곡가를 바꿔 곡을 새로 쓰고 대본을 고치는 수정을 거듭했다. 초연 당시 작곡가는 이탈리아인이었고, 아가포니코프는 세번째 작곡가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김지영기자 kimjy@hk.co.kr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 소설가 김훈이 말하는 이순신

최근 '이순신 열풍'의 진원지는 두말할 필요 없이 2001년에 나온 김훈(사진)씨의 소설 '칼의 노래'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 다시 꺼내 읽었다는 '칼의 노래'. 만화와 드라마도 모두 이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김훈씨에게 '이순신은 과연 누구인가' 직접 들어봤다.

시중에 이순신을 다룬 만화만 20여 종이 나와 있다. 이 같은 이순신에 대한 열풍은 내 소설 '칼의 노래'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칼의 노래'가 열풍의 계기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는 얘기다. '칼의 노래'가 그린 이순신에게서 현대인이 결핍하고 있는, 현대사회가 결여하고 있는 어떤 정신적인 요소 내지 마음의 풍경이 독자들에 의해 읽혀졌다고 본다. 그게 어떤 것인지 내가 말할 수는 없다.

이순신은 육군장교였다. 당시는 육군과 해군의 개념 구분이 없었다. 그는 함경도에서 여진족과 대치하다가, 조정의 명령에 의해 해군 지휘관으로 발령 받은 일개 청년장교였다. 그는 또한 갈등과 번민이 매우 많은, 억눌린 내면을 가진 인간이었다. 그는 확실한 영웅이었지만, 동시에 일개 필부의 갈등과 번민을 가진 인간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강인한 남성상만이 이순신의 전부는 아니었다.

이순신이 이끌었던 부대도 마찬가지다. 이순신의 부대라고 해서, 그들이 용기와 충성심으로 가득 차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인 부대는 아니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그들은 민간인 마을의 개를 잡아먹고, 군무를 이탈하고, 군수품을 빼돌리기도 했다. 이 점은 대하사극을 만드는 KBS 제작진에게 단단히 말해 놓았다. 마찬가지로 왜군이 역사의 적이라고 해서, 그들의 군대를 함부로 폄하하지 말라고도 했다. 일본 군대의 위용과 규율의 엄격함, 군비의 우수성을 정정당당하게 그리라고 말했다.

이순신의 위대함은 그가 '바다'라는 사실에만 입각해 살고 죽었다는 데 있다. 임진왜란 발발 전, 조정의 명령에 의해 일본으로 잠입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온 밀사가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당파성의 관점에서 도요토미를 봤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도요토미의 눈깔이 늑대 같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영웅 같다고 했다. 결국 당파성에 매몰된 조정은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이순신은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직 바다를 통해서 현실을 봤다. 사색당쟁에 빠져있던 조선 조정이 이순신을 두려워해 잡아먹으려 한 것은, 그가 어느 누구의 '자기네 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 왜 이순신인가

'상유십이 순신불사(尙有十二 舜臣不死·아직 제게는 배가 열 두 척이 있고, 순신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최근 정치인들이 애용한 이순신 장군의 장계 내용이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3월 전당대회에서 이 문장을 인용한 뒤 "충무공의 비장한 각오로 이 자리에 섰다"고 했고, 추미애 민주당 당시 선대위원장은 "이순신 장군처럼 민주당을 일으켜 세우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이순신 열풍'은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한 나라를 구했던 '강인한 남성성에 대한 향수'이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는 "한국사회가 내우외환에 시달리거나 위기에 봉착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인물이 바로 이순신"이라며 "이순신 코드는 바로 애국심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먹힐 수밖에 없다. 다르다면 그동안 이순신이 스테레오타입화(정형화) 돼 있었다면, 이번에는 그의 인간적 고뇌가 입체적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김동식씨는 이순신을 '민족주의의 상징이자 국가주의의 아이콘'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남북통일문제, 일본과의 역사적 관계 등 시대적 상황이 민족주의적 성찰을 요구한다. 때문에 이순신이라는 캐릭터는 언제나 흡인력을 갖출 수밖에 없다. 동시에 이순신의 삶과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면, 이념과는 별개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대한 대중적인 인기는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의 진정성과 실존적인 고민에 공감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순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나 저작물이 없었던 학계 역시 최근 열풍을 고무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다. 기존 이순신에 대한 저작은 1960년대 노산 이은상이 정조 때 쓰여진 충무공 전서를 바탕으로 정리한 결과물에 불과했고 이후 나온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등은 그 자료를 바탕으로 작업했거나 아류에 불과했다. 정두희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학계의 이순신 연구작업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임진왜란은 중국과 일본이 본격적으로 얽힌 첫 전쟁이었는데, 만약 이순신 장군의 승리가 없었다면 조선은 사라질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그를 새롭게 평가해야 한다. 특히 명과 일본이 교섭하는 자리에 조선은 빠질 수밖에 없을 만큼 미약한 존재였으나, 이순신 만큼은 근대적인 해전의 개념을 갖고 승리함으로써 국제무대에서 우리의 위상을 높인 점을 주목해야 한다. 또 이순신은 당시 권력구조와 지휘체제에서 보면 모세관에 해당되는 위치에 있었는데, 그의 승리가 중앙정부에까지 구조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점에 대해서도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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