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들과 운율을 맞춰 교과서를 합창하듯 읽던 국어시간, 혹은 연애편지에 곱게 적은 애송시를 낮게 읊조려 보던 어느 늦은 밤을 기억하는가. 작가, 음악가, 연기자 등 친숙한 문화예술인들이 나와 자신의 대표작이나 좋아하는 시, 소설의 한 대목을 들려주는 KBS 1TV '낭독의 발견'(수 밤 11시35분·연출 홍경수 황범하)은 그 아련한 추억 속으로 시청자들을 안내한다.지난해 11월 첫 전파를 탄 이래 지금까지 시청률이래야 겨우 2∼3%대. '애국가 시청률'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지만 책 읽어주는 기쁨, 듣는 즐거움을 되살린 25분짜리 이 프로그램에서는 수치로 가늠할 수 없는 깊이가 느껴진다. 작은 별들이 촘촘히 박힌 밤 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무대 위에서 초대 손님들이 낭독에 곁들여 들려주는 진솔한 '세상 사는 이야기'도 가슴을 적신다. 그렇게 속에 있는 말들을 다 털어놓다 눈시울을 적신 가수 양희은씨는 "30여년 방송을 하면서 이렇게 인상 깊은 프로그램은 처음"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7일 밤 KBS 본관 TV 1스튜디오, 스무 명 남짓한 '낭독의 발견' 스태프들이 제가끔 무대를 꾸미고, 악기를 조율하는 등 바삐 움직인다. 촬영 준비단계부터 잡소리를 죽이고 오직 '낭독'에 온 기운을 모으려는 배려일까, 휴대폰 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어버이 날'에 즈음해 어머니를 주제로 정한 이날 무대의 주인공은 얼마 전 막을 내린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헌신적인 어머니를 감동적으로 그렸던 탤런트 고두심씨(12일 방송).
고씨는 강하고 아름다웠던 어머니에 관한 추억을 얘기하던 끝에, 김상희의 노래 '팔베개'를 조용조용 부르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노랫말 낭독. "어머님 팔베개에 얼굴을 묻고/ 꿈을 받던 어린 내가 어언간 엄마 되어 꿈을 주는 팔베개 되었네…."
고씨는 이어 문충성의 시 '제주바다'를 들려주며 "은퇴하면 고향 제주에 내려가 꽃 가꾸며, 어쩌다 찾아오는 이들과 차 한잔 나누며, 그렇게 살고 싶다"고 했다. 끝으로 황지우의 시 '늙어가는 아내에게'를 들려주는 그녀의 표정은 '꽃보다…'의 착한 아내를 닮아있다.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녹화를 마친 고씨는 "마치 작은 카페에 들려 가까운 사람들과 정담을 나눈 느낌"이라고 말했다.
출연자들이 이렇듯 제 집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스태프들의 각별한 노력 덕이다. 아트디렉터 윤이서씨가 꾸미는 무대는 늘 정감이 넘치고, 음악감독 강승원씨와 피아니스트 신이경씨가 공들여 고른 배경음악은 낭독하는 작품과 잘 어울려 또 다른 듣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영화음악 일을 하는 신이경씨는 "준비하고 녹화하는 과정 그 자체가 한 편의 영화 같다"면서 "내가 느끼는 이 행복감이 시청자들 마음에도 가 닿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말투가 다소 어눌하고 무대를 끌어가는 힘이 약하다는 지적을 듣기도 하지만, 탤런트 송선미의 무색무취한 듯한 진행도 편안한 분위기를 내는데는 제 격이다. 얼마 전 출연한 소설가 황석영씨에게 "살다가 고민 있을 때, 술 한 병 사들고 찾아가도 되죠"라고 물어 황씨를 놀라게 했던 일화를 소개하며 "출연자들에게서 인생을 배운다"고 털어놓는다. 그녀는 "아무리 바빠도 프로그램이 끝나지 않는 한 평생토록 진행하고 싶다"고 욕심을 냈다.
세상만사가 갈수록 복잡하게 얽히고 설키는 요즘, 무거운 고민거릴랑 잠시 내려놓고, 늦은 밤 TV 앞에 앉아 문화인들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글귀에 잠시나마 귀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