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고(go)해야 됩니다." "저 혼자라면 얼마든지 합니다만 참여한 사측 대표의 역량이나 위치로는 요구안 심의가 무리입니다."6일 보건의료산업 노사 7차 산별교섭이 열린 한국여성개발원 국제회의장. 윤영규 위원장 등 보건의료산업노조 대표들과 중소병원, 지방공사, 적십자사 혈액원 등 사측 대표가 마주앉아 노조측 요구안을 심의할지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보건의료사상 처음으로 3월17일 산별교섭이 시작된 지 벌써 50여일째. 하지만 사측의 핵심조직인 국·사립대 병원 대표들이 산별 교섭에 불참하면서 협상진행이 답보상태다. 이날 노조측은 중소병원과 지방공사가 중심이 된 현재의 사측 대표를 상대로라도 협상을 진행하자며 강하게 밀어붙였고 사측은 대표성을 갖기 어렵다며 뒤로 미루자고 팽팽히 맞섰다.
"62개 병원을 대표하는 사측이 스스로를 너무 왜소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지금 참석한 대표로도 충분한 책임과 대표성이 있어요." "우리의 역량을 높이 평가해줘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의 심의나 결정이 산별에 가입된 전체 1,050개 병원을 책임지는 자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부담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노조는 사측을 어르고 띄우며 요구안 심의를 종용했지만 사측은 능란하게 이를 받아넘기면서 피해갔다. 결국 30분간의 정회.
"요구안 심의가 이루어진다면 우리로선 감당하기 어렵고 향후 무슨 욕을 들을 지 모릅니다. 7일 대한병원협회 집행부 선거가 있는 만큼 병협의 입장도 바뀔 수 있다는 점을 노조측에 이야기해 심의를 다음으로 미루도록 합시다." 정회시간에 사측이 요구안 심의를 차후 교섭으로 미룰 명분을 논의하는 동안 노조측은 "오늘은 힘들더라도 다음 교섭에는 반드시 요구안 심의가 되도록 매듭을 짓자"는 전략을 짰다.
속개된 교섭. 사측은 병협 집행부가 교체되고 지방공사 의료원도 12일께 주 5일제에 대한 기본입장이 정리되는 만큼 2주 정도 후에 산별교섭을 진행하는 게 어떻겠느냐 제안을 내놓았다. 발끈한 노조측은 "논의를 한 주 건너뛰는 것은 절대 불가하다"며 "불참한 국·사립대 병원은 응분의 대가를 치를 것이고 이들이 빠져 있다 해서 중소병원과 지방공사가 못한다고 단정해서는 안된다"고 사측을 압박했다. 사측은 "꼬박꼬박 출석한 모범학생이 결석한 학생을 대신해 야단맞는 꼴이다. 이대로 심의가 진행돼 결정이라도 나는 날에는 의사면허가 잘릴 각오도 해야 된다"며 양해해줄 것을 거듭 주장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쌍방의 주장이 30여분 이상 되풀이 되다 "다음주 교섭에서 요구안을 논의하는 것을 전제로 해 오늘 교섭을 마무리하자"는 보건의료산업노조 윤 위원장의 두루뭉실한 제안으로 2시간여의 7차교섭은 막을 내렸다.
벌처럼 쏘는 노조측 압박전술에 껄끄러운 사안을 나비처럼 피해간 사측의 수비작전이 맞선 한판이었다. 이날의 교섭은 정작 주 5일제 등 요구안 심의에 들어갔을 때 얼마나 지루한 줄다리기가 벌어질지를 보여주는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
노동계의 하투(夏鬪)가 시작돼 사업장마다 임단협이 한창이다. 노사간 치열한 머리싸움과 공방, 막전 막후 협상이 사업장을 달구고 있다. 특히 보건의료산업뿐만 아니라 금속노조 등 산별교섭은 난항을 거듭하고 있고 기아자동차 등 일부 사업장은 노사 상견례 자리가 점거농성장으로 변하기도 하는 등 순탄찮은 임단협을 예고하고 있는 실정이다. 민주노동당의 국회 진출이 임단협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도 변수이다.
지난 3일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의 임단협 1차교섭 현장. 노사대표들의 상견례 자리인 만큼 "올해는 잘 끝내봅시다"라는 덕담이 오갔지만 긴장된 분위기가 역력했다. 더욱이 2002년 임단협 과정에서 산재보상문제 등으로 파업까지 돌입한데다 비정규직 문제, 주 5일제 등 빅 이슈가 쌓여있어 임단협 교섭은 첩첩산중을 예고하고 있다.
교섭은 20차 이상 끄는 게 보통이어서 노사 양측은 두, 세달의 지루한 공방을 각오하고 있다. 노측은 지난해 12월초부터 4개월여 동안 임단협 요구안 준비와 예행연습을 거치며 사측을 압박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고 사측 역시 노측의 주장을 상쇄시킬 두터운 방패논리를 마련해 뒀다.
대우조선노조 조광래 기획실장은 "한달전부터 교섭트레이닝을 진행하며 사측의 반박논리를 꺾을 전략을 충분히 짰다"며 "올해는 주 5일제 등 큰 쟁점이 많아 순탄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대우조선뿐만 아니라 대형사업장의 노사 임단협은 거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다. 노측의 요구안에 대한 사측의 대응논리개발, 또 이에 대한 반박논리 마련 등 임단협 이전부터 갖가지 시나리오가 작성되며 공격, 수비조, 법률대응조 등 역할이 분담되고 모의교섭이 진행되는 등 상당히 치밀한 전략과 전술 하에 교섭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양보 없는 노사간 공방 끝에 파업 전후에야 협상이 타결되는 임단협 관행은 올해도 어김없이 이어질 전망이다. 노사간 불신과 협상전략의 부재가 그 원인이다. 보건의료산업처럼 본 교섭보다 절차문제로 시간을 허비하는 사례가 개별 사업장에서도 적지 않고 결국 감정싸움으로 '파업'이라는 벼랑 끝에 서고서야 하루 두, 세차례 막전, 막후협상이 진행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다 보니 물밑교섭을 통해 단협에 명시되지 않는 이면합의로 사태를 해결하고 뒷날 말썽이 생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노사정위원회 김성훈 전문위원은 "노사 모두 상대방을 설득하는 논리와 전략이 부재하고 이를 위한 적절한 인력이나 고민도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사측은 불투명한 경영으로 노조의 불신을 초래하고 노조는 파업을 전제하는 투쟁에 나서 신뢰 속에 성실한 노사교섭이 이루어지기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정진황기자 jhchung@hk.co.kr
■주5일 따른 인력확보·비정규직 올해 "뜨거운 감자"
올해 임단투는 어느 해보다 뜨거운 쟁점들이 많다. 오는 7월 시행을 앞둔 주 5일제와 관련한 월차휴가 폐지 등 근로조건 변경이 사업장마다 첨예한 쟁점으로 등장했다. 특히 공공부문과 보건의료노조의 경우 주 5일제 시행에 따른 인력확보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더욱이 정부가 공기업과 정부산하기관을 대상으로 월차휴가 폐지 등을 근로기준법 개정안대로 조기타결하도록 지침을 내리자 노동계가 자율교섭 침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몇 년간 무분규를 이어온 서울지하철공사의 사측 관계자는 "주 40시간 근로에 대한 정부의 지침으로 임단협 시 운신의 폭이 좁아진 게 사실"이라며 "노조 집행부도 강성이어서 협상이 상당히 어렵고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박일수씨 분신 이후 사회적 이슈로까지 발전한 비정규직 처우개선문제 역시 노사간 충돌이 불가피한 사안이다.
민주노총 등 노동계가 비정규직의 차별해소에 역량을 집중키로 한 반면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정규직의 과보호해소와 유연성 확보 없이는 비정규직 문제해결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자동차 4사 노조는 비정규직 복지와 고용안정 등을 위해 순이익의 일부를 사회공헌기금으로 사용할 것을 사측에 요구하면서 현재 노사간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다.
임금 역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10% 이상 인상을 단위노조에 지침으로 내린 반면 경총은 대기업 동결, 중소기업 3.8% 인상안을 내놓아 현격한 시각차를 보이고 있다.
또한 민주노총의 산별교섭 강화방침에 따라 금속노조와 보건의료산업노조가 산별교섭을 추진하고 있으나 사용자측의 거부 등 절차적 문제로 난항이 계속되면서 연대파업이 예고되고 있는 상황이다. 금속노조는 내달 15일 1차 경고파업에 이어 21일 2차 파업을 벌일 계획이고 보건의료산업노조도 산별교섭 불참 병원에서의 무기한 철야농성과 6월10일 총파업을 내세워 사용자측을 압박하고 있다.
산적한 핵심쟁점으로 순탄치 않은 임단협 전망에도 불구하고 실제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적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민주노총은 내달 16일을 집중투쟁시기로 잡고 있으나 이수호 위원장이 "불필요한 파업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데다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로 법적, 제도적 해결모색 등 유연화 가능성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적한 쟁점 때문에 산업별, 사업장별 임단협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질 경우 연대파업과 장기분규로 이어질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정진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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