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교육계의 큰 별이자 신라대 총장을 지낸 김용태(65)씨가 지난 9일 속세의 덧없음을 뒤로 한 채 머리를 깎고 불문에 귀의했다.늘 입버릇처럼 '어서 절로 돌아가야 하는데…'라며 애태우던 그가 일찍이 초심(初心)과 발심(發心)의 근원으로 삼았던 원효 화엄경의 세계로 돌아간 것.
부산 북구 금곡동 원효정사에서 월하(조계종 제9대 종정) 대종사로부터 받았던 '법산(法山)'이란 법명을 되찾은 그는 "아버지(금호선사)로부터 이미 7세 때 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을 배웠고, 13세 때 당시 통도사 주지였던 대응 대종사를 은사로 출가한 적이 있으니 어쩌면 이제야 내 근본으로 돌아간 셈"이라고 말했다.
그가 중·고교 학창 시절을 거쳐 대학을 다닌 탓에 교단에 섰다가 다시 불문으로 돌아오는 데 무려 4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자식(1남2녀)도 낳고 수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사에서 대학교수, 학장 및 총장 등 교육계에 몸담아 오며 과분하던 명예들마저 이제 와 보니 다 덧없더라"는 그는 "하지만 그것도 어쩌면 다 인생의 업이자 하나의 수행을 위한 과정이었는지 모른다"며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지난 2000년 말 신라대 총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이제 때가 됐다'며 회귀를 결심한 그는 2002년부터 자신이 직접 설계에 들어가 원효정사 불사를 시작했다. 머리를 싸매고 설계 작업에 밤잠을 설쳤던 일, 평생 해 보지 못 했던 육체 노동까지, 나이 든 그의 몸으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 터였다.
"여긴 낮엔 도심의 끝자락이지만 밤엔 개구리가 개굴대는 자연의 한가운데야. 이렇게 좋은 걸 왜 지금에야 돌아왔는지…. 하지만 이젠 그런 후회도 없어. 무위의 세계로 돌아왔으니 말이야"라는 그의 말 속엔 속세의 시름과 번뇌는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부산=김창배기자 kimc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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