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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석의 TV홀릭]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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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석의 TV홀릭]불새

입력
2004.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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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불새'는 비현실적인 드라마다. 정확히 말하면 드라마 스스로가 비현실적이길 자처한다. 아무리 미국에서 만났다 해도 엄연히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일하는 세훈(이서진)에게 미란(정혜영)이 '윌'이라고 부르는 것이나, 지은(이은주)이 가정부가 아니라 '헬퍼'라는 이름으로 일하는 것은 일반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낯설 수밖에 없다.그래서 인터넷 게시판에 뜬 지적대로, '불새'는 한때 여학생들에게 인기 있었던 '할리퀸 로맨스'를 보는 것 같다. 불행에 빠졌지만 꿋꿋하게 헤쳐가는 여자, 그녀 앞에 나타난 재벌그룹 후계자, 그리고 멋진 모습으로 돌아온 옛 남편. 이런 설정만으로도 할리퀸 로맨스가 떠오르는데, '윌'이니 '헬퍼'니 하는 단어까지 쓰니 정말 한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서구 어느 나라의 연애소설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불새'는 여기서 정체성을 찾고 어차피 비현실적인 설정, 그거라도 화끈하게 보여주자고 작정한 것 같다. 괜히 '현실'을 생각나게 하는 걸리적 거리는 설정들은 제거하고, 할리퀸 로맨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여성판타지 특유의 요소들을 부각하는데 주력한다. '불새'는 부부였던 지은과 세훈이 헤어진 10년 후 몰락한 지은과 성공한 세훈의 재회를 기본 설정으로 하고 있지만, 지은이 겪은 10년간의 고생은 단 한 컷도 나오지 않는다.

드라마 진행에 별 도움이 되지않는 지은의 고생담을 그려 어정쩡하게 현실적인 척 하느니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나 계속 밀어붙이자는 것이다. 그래서 '불새'는 불과 4회 만에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그린 뒤, 10년을 훌쩍 뛰어넘어 곧바로 지은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 모습에 반한 멋진 남자 정민(에릭)과, 역시 멋진 모습으로 돌아온 세훈을 한 직장 안에 몰아넣어 불꽃 튀는 삼각관계를 성립시킨다.

해외 유명그룹의 경영주가 잠깐 만나보고도 그 품성과 능력을 알아보고 취업 제의를 할 정도인 지은이 도대체 왜 10년 동안 헬퍼만 하고 있었는지 묻지마라. 그건 단지 두 남자에게 지은의 매력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고, 두 남자를 부딪치게 만들기 위한 설정이니까.

'불새'는 비현실적이고 유치하며, 노골적인 여성 판타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기분 나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신 '불새'는 철저하게 등장 인물들의 감정에 충실하고, 거창하게 작품성 있는 척 하지 않으면서 이런 종류의 드라마에서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것들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비록 비현실적이지만 두 남자의 불꽃 튀는 대립은 강한 감정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연기력과 별개로 에릭은 캐릭터에 꼭 맞는 멋진 분위기를 풍긴다.

할리퀸 로맨스를 열심히 봤던 여학생들이 커서 이제는 "저거 봐. 예상대로 되잖아" 하고 키득거리며 볼 수 있는 그런 드라마랄까. 옛날이라면 이런 드라마의 존재가 불쾌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현실적인 걸 찾고 싶은 사람들은 MBC '결혼하고 싶은 여자'나 외화 '섹스 & 시티'를 보면 되는 세상 아닌가. '불새'의 비현실성에 열 내는 사람들에게 이 드라마의 팬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에릭이 예쁘잖아." 하긴, 그거면 된 건지도 모르겠다.

강명석/대중문화평론가

lennonej@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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