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테러는 유일한 지구적 패권국가로 떠오른 미국으로 하여금 국제사회에서 일방적인 단독주의를 거리낌없이 행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사려와 관용이 부족한 신보수주의로 무장한 부시정권은 이를 계기로 이라크 전쟁을 강행했다. 수천명의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9·11테러와 군사력만 믿고 밀어붙인 명분없는 이라크 전쟁은 축복 받아야 할 인류의 새 밀레니엄을 벽두부터 피로 물들였다.이에 비해 작금 세상을 경악하게 하고 있는 미군에 의한 이라크인 학대사건은 일견 사소해 보인다. 힘있는 자의 권리와 자유를 편파적으로 외치는 신보수주의적 사고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전환기에는 언제나 실마리가 되는 사건이 등장한다. 이번 사태는 훗날 그런 사건으로 평가받을 가능성이 높다. 향후 중동정세는 물론 미국의 일방주의적 패권추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폭발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 바그다드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는 후세인의 공포정치를 상징하는 곳이다. 지난 9월 이후 이곳서 자행된 학대사건으로 미국은 크게 두 가지를 잃게 됐다. 전쟁의 명분과 미국에 대한 이라크민중의 신뢰이다.
학대행위는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도 저질러졌다.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크다. 미국이 학대와 고문을 전쟁 승리를 위한 전략적 도구로 사용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국제 테러조직 알 카에다와의 관련'에서 '불법적인 대량살상무기 보유'로, 또한 '이라크 민중 해방' 등으로 궁색하게 바뀌었던 미국의 전쟁명분은 모두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됐다. 미국이 주장해 온 '선의의 전쟁'이 '불법전쟁'으로 확인된 것이다.
미국에 대한 이라크 민중의 믿음은 이미 손상된 상태였다. 가깝게는 수니파 거점 도시 팔루자에서 발생한 미군의 민간인 대량 살상 사건이 반미 감정을 매우 증폭시켰다. 이번 학대 사건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슬람권 전체 모슬렘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양상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현재 미국이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이라크 치안 유지 및 재건작업,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당면 과제는 더욱 심각한 딜레마에 빠지게 됐다. 미국이 구상하고 있는 소위 '도미노식 민주주의 전파'에 의한 새로운 중동체제의 구축안도 공허해 보인다. 문제는 이라크 재건과 민주정부 수립 작업은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꼭 완수해야 하는 과제라는 점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의 초래되는 극심한 혼란을 국제사회가 감당하기는 매우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현재의 방식으로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변해야 한다. 부시 정권은 그동안 이라크인의 신뢰와 자발적인 참여, 국제사회의 동참을 유도하는데 있어서 철저히 실패했다. 전혀 준비하지 못한 모습으로 힘만 앞세우는 패권주의자의 역할만을 자처했다.
그러나 부시 정권이 스스로 변화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가능성 있는 방법은 합법적인 절차에 의한 미국의 정권교체와 그 이후 다시 국제사회와 협력의 틀을 재건해 당면 과제를 수행하는 방안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시정권은 자주 스스로를 로마제국에 비유하곤 한다. 왜 그러는지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부시정권이 현재 상황의 심각성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면 정권 차원이 아니라 '제국' 자체의 몰락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단독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력을 앞세운 군사적 압박 이외에는 그리 많지 않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김철훈 국제부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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