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으로 취임해 KBS의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국민이 원하는, 국민을 위한 민주화 시대의 공영방송으로 만들기 위해 작업에 착수하니 어려운 문제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첫째로 어려웠던 것은 노조가 제일 먼저 들고나온 인사 문제였다. 과거 청와대나 안기부, 군에 있던 사람들이 KBS에서 요긴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퇴출하라는 것과 1980년 방송통합 당시 정부측에 찍혀서 쫓겨났던 사람들을 전부 복직시키라는 요구였다. 나는 민주화합추진위에서도 과거 정권에 비협력적이라는 이유로 쫓겨난 사람들은 아주 큰 잘못이 있는 경우 등을 제외하고는 복직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었기 때문에 KBS에서 쫓겨난 사람들도 선별은 했지만 대부분 복직 시켰다. 나의 결정이 MBC나 다른 정부 산하 기관에도 영향을 주어 잇달아 많이 복직이 된 것으로 안다.
그러나 낙하산으로 내려온 사람들을 무조건 퇴출하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그들도 다 공무원들이고, KBS가 마냥 좋아 온 것도 아니기에 무조건 퇴출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사람들은 하나하나 인적 사항을 다 살펴본 뒤 적당한 자리로 옮겨주었다. 해당자들이 다소 불만은 있었겠지만 내 조치에 순종해서 다 해결됐다.
그때 노조와 대화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노조 대표들은 과거 정부에 가까웠던 간부 직원들은 상대 안 하려고 했다. 나는 가능한 성의와 인내로서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에 힘썼다. 내가 취임한 뒤로는 사장을 공격하는 벽보가 한번도 붙은 적이 없지만 노조가 권익문제 뿐 아니라 프로그램편성 제작에까지 간여하는 등 지나친 요구를 많이 해 힘들 때가 많았다. 고희일(高熙日)이나 안동수(安東洙) 위원장은 협상 석상에서는 강경하게 나오면서도 이튿날 아침이면 "어용노조가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장님은 존경합니다"라고도 했다.
그 다음은 전 정권 때 KBS 시청료 거부운동으로 적자가 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개선하기 위해 시청료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방송을 정직하고 건전하고 재미있게 하며 품질을 개선하면 될 것으로 생각하고 방송 프로그램을 많이 개편했다. 시민단체 대표들과 노조위원장, 방송 전문가들과 사장인 내가 직접 대화하고 토론하는 공개방송도 여러 번 하며 시청자들과의 대화도 시도했다. 나와 같이 토론한 이로는 방송전문가로 유재천(劉載天) 교수나 최창섭(崔昌燮) 교수, 인명진(印名鎭) 목사, 정대철(鄭大哲) 의원, 고희일 노조위원장 등이었다. 얼마 지나 KBS가 공영방송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게 되자 시청료 거부운동을 주도하던 김희선(金希宣· 현 열린우리당 의원)씨, 인 목사 등 시민단체 대표들이 찾아와 시청료 거부운동을 하지 않고 협력하겠다고 했다.
나는 보도 교양 오락 등 방송의 3대 기능 중 보도 기능은 정직하고 신속하게 보도하고, 교양 기능은 새로운 민주시민사회를 준비하며 실천하도록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형성해나가는데 초점을 두었다. 오락은 재미는 있되 건전한 문화의식과 정서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프로그램을 짜도록 지지, 독려했다.
나는 그 때 프로그램중 드라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역사드라마로 한무숙(韓戊淑)씨의 '역사는 흐른다'를 극화하도록 했다. 작가 한씨가 원작보다 일제의 가혹상을 너무 강조, 지나친 점이 있었다고 일본 문학인들한테 지적을 받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홈 드라마로는 홍승연 작가의 '사랑의 굴레'를 방영했는데 시청률을 수십% 끌어 올렸다. 언젠가 MBC에서 '사랑과 야망'으로 인기가 올라가고 있던 작가 김수현씨를 볼 기회가 있어 "MBC에서만 활동 하지 말고 KBS에도 와달라"고 했더니 "KBS는 감당을 못해요. MBC가 나한테 주는 만큼 주지 못할 거예요"라고 했다. 그러나 '전원일기'에 출연했던 고두심씨는 내 부탁을 받고 '사랑의 굴레'에 출연해, 89년 말 KBS 연기대상을 받았다. 고씨는 그 뒤에도 적십자 홍보대사도 하는 등 내가 하는 활동에 무보수로 많이 참여해줘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서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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