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행인도 드물어 대낮에도 퇴락한 느낌만 가득한 러시아 동쪽 끝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 그러나 8일 저녁 무렵이 되자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서태지(32)의 공연이 열리는 디나모 스태디움으로 향했다. 공연장은 금새 1만5,000여 명으로 가득 찼다. 한국에서 도착한 800여 명의 서태지 팬(상상체험단)과 현지 교민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블라디보스토크의 현지인이었다. 안전사고에 대비해 동원된 경찰만 1,500명.오후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먼저 러시아 현지그룹 MBK와 서태지가 설립한 레이블 괴수인디진 소속의 넬과 피아가 잇따라 무대에 올라 서막을 장식했다. 그리고 백야의 러시아에 겨우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오후 9시35분께 도시를 쩡쩡 울리는 폭죽소리와 함께 서태지의 공연은 시작됐다. 이번 공연은 지난 1월 귀국해 열었던 국내 공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레퍼토리도 '1996년,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로 시작해 '인터넷 전쟁' '필승' '이 밤이 깊어가지만' 등으로 이어지면서 비슷하게 흘러갔다. 무대에 꽃가루를 날리고, 수시로 불기둥을 쏘아 올리고, 관객들을 향해 대형 풍선을 날리는 등 자잘한 쇼까지 판박이였다. 먼 이국에서의 야외공연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소리의 울림이 심했다.
처음 서태지가 블라디보스토크 공연계획을 발표했을 때 많은 이들이 "러시아 사람들이 서태지를 알아?"라고 반문했다. 게다가 KT& G의 전액 후원으로 추첨을 통해 선발한 600명의 상상체험단과 200여 명의 스태프, 취재진이 대형 선박 두 척에 나눠 타고 동행하는 초대형 프로젝트 계획이 뒤따르자 의문은 더 커졌다.
사실 현지인 대부분은 서태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 공연 포스터가 나붙기 전까지 '서태지'란 이름도, 한국에 록음악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공연장에서 만난 올가(19·극동기술대학교 재학)씨는 "여기 모인 대부분이 마찬가지다. 하지만 러시아 사람들이 워낙 콘서트를 좋아하고, 한국의 록음악을 들어 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기 때문에 왔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지인들은 꽤 후한 점수를 매겼다. 대학생 니콜라이(20)씨는 "언어도 다르고, 우리가 생각한 록과 많이 달라 서태지의 음악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훌륭한 쇼임은 분명하다"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였다. 관객들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손을 들어 올려 흔들며 축제 분위기를 즐겼다. 공연이 끝나고 10여 분간 이어진 화려한 불꽃놀이까지 더해지자 모두 환호했다.
전세계 수많은 도시 중 공연지로 블라디보스토크를 택한 이유에 대해 KT& G측은 "서태지와 함께 젊은이 기 살리기를 위한 행사를 고민하던 중, 지금껏 어떤 한국 가수도 시도하지 않은 곳이기에 선택했다"고 밝혔다. 더구나 블라디보스토크는 항일운동의 중심지였으며, 올해는 한·러 수교 120주년에 한인 러시아 이주 140주년이어서 그 뜻이 깊다.
이 곳에는 8만명의 고려인이 있고, 9개의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학생이 1,500명에 이른다. 하지만 전액 KT& G의 후원으로 온갖 볼거리가 가득한 양질의 공연을, 1장 당 215루블(한화 약 9,000원) 정도의 값싼 티켓가격을 받고 왜 러시아에서 열어야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현지 관객들의 환호성에 기분 좋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서태지의 '깜짝쇼'에 모두가 말려든 건 아닌지.
/블라디보스토크=최지향기자
misty@hk.co.kr
■국내 참관단 "선박 불편" 항의 소동
서태지의 블라디보스토크 공연의 참관단인 상상체험단 중 일부가 "시설이 너무 열악하다"며 항의해 지난 6일 선박 출발이 지연되는 소동이 빚어졌다. 소동은 체험단이 타고 갈 선박 2대 중 1대가 갑자기 교체되면서. 당초 행사 주최측은 자옥란호와 은하호 2대를 준비했다.
그러나 은하호의 계약이 갑자기 무산되면서, 자옥란호 보다 내부 시설 수준이 떠러지는 세원호를 대체 투입했다. 그리고 수용인원 173명인 세원호 3등 객실에 체험단 150명을 한꺼번에 수용했다. 멋진 선상체험을 기대했던 팬들은 1인당 면적이 모포 한 장 크기인 0.85㎡에 불과한데다 화장실고 부족하고 엔진소리가 시끄러운 것에 항의하며 여행을 거부했고, 그 때문에 속초항에서 3시간 가량 출발이 지연됐다.
후원사인 KT& G 관계자는 "배가 갑자기 바뀌면서 상상체험단의 일부에게 불편을 드렸다"고 사과하고 "다른 형태로 보상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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