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진료하면서 많은 폐암 환자들이 담배를 한 번도 피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 놀랐어요." 미국 MD앤더슨 암센터에서 30여년동안 폐암전문의로 활약하다 2001년 귀국한 국립암센터 이진수 부속병원장은 "특히 여성 폐암 환자들의 절대 다수가 담배를 한 번도 피우지 않았던 경우"라고 안타까워 했다. 그는 "미국에 있을 때 폐암을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답변하곤 했다"면서 "그러나 한국에 와서는 이런 상식적인 조언만으론 폐암을 예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여성환자 비율 외국보다 훨씬 높아
세계 의학계에서 폐암은 남성에게 주로 발생하는 암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조금 다른 패턴을 보이고 있다.
2002년 한국중앙암등록사업 자료에 따르면 전체 폐암 환자 가운데 4분의 1이 여성이었다. 폐암 환자 수는 남성 8,876명, 여성 2,865명. 75.6%가 남성이고 24.4%가 여성이었다. 미국의 경우 전체 폐암 환자에서 여성 비율은 15%정도로 낮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여성 흡연율이 이에 상응할 만큼 높은 건 아니다. 2003년 한국금연운동협의회가 발표한 성인흡연율은 남성 56.7%, 여성 3.5%. 흡연율은 남자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데 폐암 환자 중 4분의 1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정말 억울(?)하고, 이상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진수 병원장은 "충격적인 것은 미국 폐암 여성환자의 90%가 흡연자라면, 우리나라 여성 폐암 환자의 85%정도가 비흡연자라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국내 남성 폐암 환자 가운데 비흡연자는 10% 미만이다.
폐암의 주요 원인인 '직접 흡연' 외에 무언가 또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이다.
비흡연자의 발병원인은 간접흡연!
이 병원장은 간접흡연에 노출되는 것도 폐암 발생에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병원장은 "간접흡연과 폐암과의 관련성 연구는 아직 진행 중이어서 데이터를 내놓을 순 없다"고 조심스러워하면서도 "거의 모든 성인 남성이 담배를 피우는 환경 속에서 자란 세대가 이제 성인이 된 지금 간접흡연의 피해자로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국립암센터에서 만난 대부분의 여성 환자들은 한결같이 자신은 비흡연자이지만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심한 골초'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찬동(57)씨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나를 안고 줄담배를 피우셨던 일이 눈에 선하다"면서 "엄마의 담뱃불에 손등을 덴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녀의 오빠는 후두암으로 작고했다.
또 다른 여성환자 권영자(58)씨는 "아버님이 풍년초를 하루 두세 갑 이상 피우셨다"고 회상했다. 같은 병실의 김부임(48)씨는 " 친정아버지가 기거하시는 사랑방에는 늘 담배연기가 자욱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은 한 번도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여성은 폐암에 민감하다?
간접흡연이 폐암을 증가시킨다는 것은 이미 의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비흡연 여성에게 이렇게 폐암 발생이 높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 병원장은 여성들이 "폐암에 대한 민감도(susceptibility)가 훨씬 높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발암물질 활성화 효소의 남녀 차, DNA복구 능력의 차이, 여성 호르몬의 영향 등으로 인해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폐암 발생위험도가 높다는 것이다. 특히 어린 나이에 노출되는 발암물질이 폐암 발생에 상당히 강력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외국의 연구에서도 배우자보다는 부모의 흡연에 의한 폐암발생 상대위험도가 더 높다는 것을 알려준다. 비흡연자인 여성이 흡연자인 남편 때문에 폐암에 걸릴 상대위험도는 1.19∼1.9로 보고됐으나, 소아기와 청소년기 어머니의 흡연으로 인한 폐암 위험도는 학자에 따라 1.49에서 8.2까지 보고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특히 흡연자와 생활한 기간에 따라, 특히 25년 이상일 경우 폐암 발생 위험도는 2∼3배나 높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간접흡연의 노출정도, 양, 기간에 따라 폐암 발생 위험이 달라지는 것이다.
한편 직장에서의 간접 흡연도 1.4배 정도 폐암발생 위험을 높이며, 특히 30년 이상 노출됐을 경우엔 2.08배나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암의 비율이 높다
우리나라 여성 폐암 환자의 또 다른 특징은 선암의 빈도가 높다는 것이다. 전체 폐암 여성 가운데 75.5%가 선암 환자였다. 폐암은 보통 소세포암, 편평상피세포암, 대세포암, 선암 등 4종류가 있는데, 남성 폐암 환자에게는 편평상피세포암이 가장 많다.
그러나 비흡연자에서는 남녀 모두 선암이 가장 흔하다. 여성들은 흡연자라 하더라도 선암이 가장 많다. 외국 여성에게도 선암이 제일 많다.
이 병원장은 "선암 발생은 필터 담배가 선보이면서 세계적으로 증가 추세이다"라면서 "간접흡연으로 들이마시는 담배연기는 대부분 부류연(副流煙)으로 입자가 작아 폐 깊숙이 들어갈 수 있고, 특히 폐 가장자리에 주로 발생하는 선암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끽연자가 빨아들이는 주류연(主流煙)에 비해, 담뱃불에서 올라오는 부류연에는 강력한 발암물질이 다량 함유돼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여성에게 선암이 많은 것을 놓고 일부 학자들은 여성 호르몬 때문이라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남자보다 빨리 발병한다
우리나라 여성 폐암환자의 연령은 남성보다 젊게 나타났다. 특히 2002년 한국중앙암등록사업 자료에 따르면 30대미만에서의 환자 성비는 여성이 70∼75%를 차지할 정도였다.
전문가들은 일반적으로 선암은 다른 폐암 종류보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발병하는데, 여성폐암의 대부분은 선암이 차지하고 있어, 이 때문에 여성환자의 폐암 발병 연령이 낮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폐암 너무 늦게 발견된다
국내 암 사망원인 제1위를 차지하고 있는 폐암은 안타깝게도 상당히 진행되기 전에는 자각증상이 없어 조기발견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폐암의 초기 증상은 감기나 기관지염과 비슷해 의사들조차 감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성 폐암 환자들은 흔히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해 병원을 처음 찾게 되는데, 흡연자가 아니기 때문에 환자나 의사 모두 폐암에 대한 가능성은 일단 접어두고 다른 원인을 찾는 경향이 있어 가뜩이나 발견이 늦은 폐암의 진단시기를 더 늦추는 경향이 높다. 폐에 물이 찬다고 결핵성 늑막염으로 진단 받고 치료하다 나중에야 폐암으로 밝혀지는 경우도 많다. 또 폐암이 전이돼 늑막에 물이 찼는데, 폐암보다는 위나 유방, 대장암에서 전이된 경우가 아닌가 잘못 판단하고 내시경 검사 등 여러가지 검사를 받는 경우도 많다. 담배도 피우지 않는 여성인데 설마 폐암에 걸렸겠냐고 잘못 생각, 많은 의사들이 암 진단이나 치료를 적절하게 실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여성들은 양쪽 폐에 동시에 암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이 병원장은 "수술이 가능한 1∼2기에 발견되는 환자는 남녀 통틀어 20%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라면서 "발견이 너무 늦은 탓인지, 5년 생존률이 11.4%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미국 폐암 환자의 5년 생존률은 14.2%로 우리보다 약간 높다.
비록 폐암이 췌장암이나 간암을 제외한 다른 암에 비해 월등히 생존률이 낮기는 하나, 최근 새로운 항암제가 꾸준히 개발되고 있어 폐암의 치료 성적도 점점 향상되고 있다.
이 병원장은 "4기암과 말기암은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면서 "암환자와 가족들 가운데 4기라고 진단 받으면 말기암 선고를 받았다고 여기고 아예 치료를 포기하는 사례가 많은데, 4기 암은 적절한 항암 약물치료를 받으면 증상 완화는 물론 수명 연장과 장기 생존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일부 환자들은 선암은 수술하면 더 빨리 진행된다는 잘못된 선입견을 갖고 있다"면서 "이레사 등 최근 개발된 항암제는 암세포를 선택적으로 억제할 수 있어 좋은 치료 효과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송영주 yj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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