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비를 뿌릴 듯 짙은 구름이 낮게 깔린 8일 오후 5시, 남산골 한옥마을의 박영효 가옥에서 조선 선비들이 즐기던 풍류음악이 울려 퍼졌다. 병풍을 치고 돗자리를 깐 대청 마루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100명 남짓한 관객들은 차일을 친 마당 의자에 앉아 들었다.음악회는 시조시에 가락을 얹어 부르는 가곡으로 시작했다. '바람은 지동(地動)치듯 불고 궂은 비는 붓듯이 온다/눈 정(情)에 거룬 임을 오늘 밤 서로 만나자 하고 판 첩 처서 맹서 받았더니 풍우 중에 제 어이 오리/진실로 오기 곧 오량이면 연분인가 하노라' 라는 운치있는 노래(최수옥)가 가야금(김정자)과 장구(이유경) 반주로 불려졌다. 이어진 또 한 곡의 가곡은 연애편지를 직접 가져오지 않고 남의 손에 전해온 임을 은근히 타박하는 '남하여.' 끝으로 대금(박용호)과 가야금(김정자) 이중주로 40분 남짓 '영산회상' 한 바탕을 탔다.
한결같이 느짓하고 평화로운 음악이다. 감정을 확 드러내는 것도 아니어서 담백하다 못해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이렇게 느려터진 음악을 누가 듣겠나 싶지만, 그 한가로움과 반듯한 아취야말로 느림과 비움을 내세우는 최근의 이른바 '웰빙' 바람에 딱 들어맞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음악이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 낯선 것이 되어버려서, 음악을 필수 교양으로 익혀서 마음을 다스리는 방편으로 삼았던 옛 선비들의 멋드러진 풍류도 아득하게만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날 공연은 한국전통가곡연구회가 격주로 3회에 걸쳐 마련한 '남산골 풍류음악회'의 첫 자리. 지금은 사라져버린 풍류문화를 되살린다는 취지도 그렇지만, 서양식 극장무대를 벗어나 한옥으로 자리를 옮기고 보니 비로소 우리 전통음악이 제자리를 찾았다는 반가움이 앞선다. 이 음악회는 22일과 6월 5일 두 차례가 더 남아있다. 22일은 여러 시조를 노래하고 피리와 대금 이중주 '수룡음', 대금 독주 '청성자진한잎'을 마련했다. 6월 5일은 가곡 외에 거문고·가야금·대금·피리·해금·양금·단소·장구의 줄풍류 합주 영산회상을 들을 수 있다.
아마추어 음악가들인 선비들이 사랑방이나 풍광 좋은 정자에 모여 조촐하게 음악을 펼치고, 그 흥취를 시와 그림으로 남기던 전통이 새삼 그리운 것이 그저 빛 바랜 노스탤지어는 아닐 것이다. 한옥마을의 풍류음악회가 3회에 그치지 말고 상설 공연으로 자리잡았으면 한다. (02)2277―3431
/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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