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엽편주(一葉片舟) 무동력 요트에 몸을 싣고 태평양을 횡단한 석지명(釋之鳴) 스님의 입항식이 8일 부산 수영만 요트항에서 각계인사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한국일보가 창간 50주년을 맞아 서울경제, 부처님오신날 봉축위원회와 함께 기획한 지명스님의 태평양 요트횡단은 4개월간 6,400마일(1만300여㎞)의 바닷길을 헤쳐온 구도(求道)의 대장정이었다. 1월10일 미국 샌디에이고항을 출항, 하와이와 일본 오이타를 거쳐 이날 오후 부산항에 닿은 지명스님을 만났다./편집자 주
"허허, 얻은 것은 무(無)더이다."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밟은 스님이 공손히 합장했다. 하고픈 말도, 소개하고픈 시련도 많을 터인데 첫마디부터 휑하다. "망망대해에서 삶과 죽음을 오갔으되 닻을 내리고 뭍에 발을 내딛으니 다 끝이지 않소. 훌훌 털어내야지. 세상살이가 다 이와 같습니다."
'고통의 세계에서 피안에 이른다'는 바라밀다(波羅蜜多)호는 벗겨지고 갈라져 생채기만 가득 남았다. 바람에 찢겨진 태극기와 파도에 망가진 태양열 발전기판을 지긋이 바라보던 스님이 "고생은 저 놈이 다했지. 그래도 오늘은 오색 등을 달아 그런지 때깔이 곱구먼" 하며 뱃전을 쓰다듬었다.
찰나의 감회도 잠시, 오전부터 스님 일행을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들 앞으로 발걸음을 뗐다. "지명 스님, 세인(世忍) 스님, 김정자(65) 김옥희(65) 홍영숙(57) 이영화(55) 신도님!" 차례로 태평양을 횡단한 스님 일행의 이름이 호명되고 믿음 하나로 태평양을 횡단한 스님 일행의 도전정신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메시지가 이어졌다.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은 "목숨을 건 지명 스님 일행의 태평양횡단은 각고의 수행과정이자 법문의 실천수행"이라고 평했고, 불국사 종상 스님은 "혜초 스님이 온갖 고행을 무릅쓰고 불경을 전했다면 사바세계에 희망을 가져온 지명 스님의 대항해는 '신왕오천축국전'에 비견된다"고 말했다. 스님 일행의 태평양 항해를 물심양면 도와줬던 (주)영조주택 윤호원 회장도 "모든 국민에게 용기와 도전, 희망을 보여준 청년정신의 상징"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지명 스님의 답은 간결했다. "용맹정진 해야 할 중이 요란을 떨었는데 너무나 과분한 환대입니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다'는 작은 깨달음이나 얻고자 떠난 뱃길이었습니다."
실로 대장정이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감히 상상도 못할 1만㎞의 바닷길을 120여일 동안 20년이나 된 길이 48피트(14.6m)짜리 무동력 중고요트(15톤)에 의지했다. 1월10일 샌디에이고항을 떠나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닿기(본보 3월9일자 22면)까지, 다시 오이타항에 입항(본보 4월28일자 44면)할 때까지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겼는지 모른다.
태풍 '수달'에 밀려 바람 한 점 없는 무풍지대에 갇혀 꼼짝도 못할 때가 있었고 초속 40노트의 강풍과 5∼6m의 격랑이 배를 집어삼킬 듯 덤벼들 때도 있었다. 예불은커녕 끼니도 거르고 뜬눈으로 밤을 지샌 날이 부지기수다.
오이타에서 부산항에 닿은 마지막 뱃길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요트 프로펠러와 방향타가 그물에 걸려 아예 움직이질 않았다. 스님은 "부처의 가르침이 이런 것이구나" 무릎을 쳤단다. "결국 다른 요트의 도움으로 항해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폼 나게 들어와야 하는데 부처께서 마지막까지 시험을 하신 까닭은 겸손 하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하고 되물었다.
"헌데 스님! 피안은 보셨습니까?" 궁금증을 참지 못한 기자의 어울리지 않는 질문에 스님의 대답이 알듯 말듯하다. "허허, 몸이 느낀 피안을 혀로 풀어내면 어긋나기 마련이요(개구즉착·開口卽錯). 다만 죽음과 가장 가까이서 수행을 할 수 있어서 제 부족함을 깨달았습니다."
함께 횡단에 참가했던 여신도 4명은 스님 옆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이구동성으로 한마디했다. "다신 (요트) 안타요. 금생(今生)은 말할 것도 없고 내세에도 그 다음 생에도…. 하지만 삶에 다른 어려움이 닥치면 잘 이겨낼 것 같아요."
스님의 다음 목표는 남태평양 횡단. 그땐 아무에게도 안 알릴 참이다. "이번 횡단에서 깨달은 바를 구체적인 법문 수행으로 이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다 마음에 한 자락 바람이 일면 훌쩍 떠날 겁니다. 그땐 찾지 마세요."
지명 스님의 '태평양 항해기'는 내주부터 본보 지면에 연재될 예정이다. "머리가 텅 비어 뇌사상태"라는 스님은 "이번 일주일은 그냥 쉬고싶다"고 말했다.
/부산=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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