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이 깊은 부모를 살리기 위해 제 장기를 잘라내는 자식 이야기는 대중매체가 즐겨 내보내는 미담 기사 가운데 하나다. 신체는 존재의 근원적 바탕이므로, 그 신체 일부를 타인에게(그 타인이 설령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건네는 행위는 숭고한 덕행으로 칭송되면서 진한 감동을 자아낸다. 사람들이 그것을 효(孝)의 가장 고귀한 실천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자연스럽다. 대중매체는 그런 사례들을 눈에 띄게 보도함으로써 공동체 구성원 전체에게 이 자기희생적 덕행을 은연중 강요한다.사실, 자식으로부터 부모에게 장기가 이식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사태가 아니다. 생물체들은 일반적으로 제 유전자가 되도록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 그런데 부모는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본능적 사명을 이미 마친 개체들이다. 그리고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장기를 받는 것은,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자식이 그 유전자를 더 널리 퍼뜨릴 가능성을 줄이는 일이다. 목숨을 살려내기 위한 장기 이식이라면, 자식으로부터 부모 쪽으로의 이식보다는 부모로부터 자식 쪽으로의 이식이 생물학적으로 더 자연스럽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우리 속담은 그런 생물학적 지혜를 요약하고 있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희생을 강요하는 대중매체의 캠페인은 그런 생물학적 지혜를 거스르는 일이다.
그런 한편, 인류를 다른 생물체와 구별하는 '문화'라는 범주는 본디 반(反)자연이라는 의미에서 반(反)생물학이다. 그리고 효행이라는 덕목도 그 문화의 일부분이다. 특히 동아시아 사회에서, 효는 가정을 지탱하는 윤리였을 뿐만 아니라 천하를 바루는 원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통적 효의 원리가 현대 민주주의·개인주의와 길항하는 것도 사실이다. 현대적 효의 지향점은 생물체로서의 인간과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 사이의 경계 어딘가에 놓여있을 것이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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