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오늘]<1102>살리에리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오늘]<1102>살리에리

입력
2004.05.07 00:00
0 0

1825년 5월7일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작고했다. 향년 75세. 살리에리라는 이름이 일반인들에게 깊이 각인된 것은 영국 극작가 피터 셰이퍼의 희곡을 무대에 올린 연극 '아마데우스'(1979년 초연)와 이를 바탕으로 밀로스 포먼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같은 제목의 영화(1984)를 통해서일 것이다. 이 연극과 영화에서 살리에리는 여섯 살 아래의 동료 모차르트의 재능에 대한 질투로 그를 끊임없이 박해하다가 결국 독살한 무정하고 재능 없는 음악가로 묘사된다.그러나 이것은 셰이퍼의 '악의에 찬' 상상이 빚어낸 살리에리일 뿐이다. 살리에리의 재능이 모차르트만 못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그 재능이 빈 황궁의 궁정악장이 되기에 턱없이 모자란 것은 아니었다. 또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다소간 경쟁심을 느꼈을 수는 있겠지만, 그가 질투에 눈이 멀어 손아래 동료를 학대할 만큼 속 좁은 사람은 아니었다. 살리에리의 친구였던 하이든이나 제자였던 베토벤, 리스트, 슈베르트 같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들의 친구·스승을 따뜻하고 속 넓은 사람으로 평가했다. 특히 베토벤은 살리에리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세 곡의 소나타를 바치기까지 했다. 하물며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35세로 요절한 모차르트의 생애가 그 불세출의 재능에도 불구하고 불우했던 것에 견주면, 그 두 배 이상을 산 살리에리가 생전에 넘치는 명예와 사랑을 누린 것이 불공평했다고 느낄 만은 하다. 살리에리는 오페라, 발레음악, 오라토리오, 종교음악, 교향곡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고, '악수르, 레도르무스' '다나이드' '타르타르' 같은 그의 오페라들은 빈만이 아니라 파리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그는 1817년에 문을 연 빈 음악원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