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KBS 사장에 취임한 것은 1988년 10월이었다.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은 받았지만 실제로는 대통령의 추천이나 정부의 내정 없이 KBS 이사회에서 자유경선에 의해 선출됐으니 민선 사장인 셈이다. 우리나라 방송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6·29 이후 민주화가 되자 방송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일종의 감독기능을 가진 방송위원회가 발족됐다. 초대 위원장에는 강원룡(姜元龍) 목사가 선출됐다. 그는 종교인으로서는 드물게 역사의식이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투철하고, 언론 특히 방송매체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철저해 KBS 사장을 새로 뽑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내가 KBS 사장 물망에 올랐다는 소식은 8월 중순 KBS 간부들을 통해 들었다. 8월30일에 강 목사가 나를 만나자고 해 갔더니 나를 KBS 사장으로 추천하겠다고 했다. 나는 과거 KBS에 방송 출연자나 자문위원으로 출입하면서 그 복잡하고 어려운 분위기를 잘 알고 있기에 적임이 아니라고 사양했다. 그러나 10월 초순에 강 목사가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밤 11시가 되도록 나에게 사양하지 말라고 권유하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 때 강 목사는 민주화 시대에 KBS를 맡아서 지휘할 사람은 네 가지 조건에 부합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있어야 하고, 둘째로 도덕성이 믿을 만해야 하고, 셋째로는 좌경화돼있지 않아야 하며, 넷째로는 여·야당이 반대하지 않고 찬성해야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약 30여명의 후보자를 놓고 이 네 가지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을 고르다 보니 나만 남았다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참지 못하며 "능력보다 네 가지 조건이 우선해야 합니까. 나는 전문성이 부족하지 않습니까"라고 했으나 강 목사는 내가 적임자라고 역설하는 것이었다. 강 목사는 야당쪽에서도 이미 찬성했다고도 말했다.
11월1일 사장 선출을 위한 KBS이사회가 열렸다. 처음 후보자는 9명이었다는데 투표를 몇 번 거듭한 결과 2명으로 줄어들었으며 결국 7대 5로 내가 최창봉(崔彰鳳) 당시 KBS 부사장보다 2표를 더 얻어 사장으로 뽑혔다. 다음날 아침 강용식(康庸植) 문공부 차관이 만나자고 연락이 와 올림피아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후보자는 여러 명이었지만 사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은 처음부터 서 선생을 지지했다"고 하면서 앞으로 자기와 모든 것을 협의하면서 잘해보자고 했다. 강 차관의 어조가 방송에 한해서는 장관보다도 본인이 더 실세라고 자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후에 알게 됐는데 그때 정부에서 KBS 사장으로 원하던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 바로 강 차관이었다. 3일 오후에 문공부 장관실에서 정한모(鄭漢模) 장관이 "대통령이 직접 드려야 될 것을 대신 전달한다"면서 임명장을 주었다. 또 총리실로 이현재(李賢宰) 총리를 방문해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듣고 돌아왔다.
내가 KBS 사장이 된 데 대해 방송 전문가가 아닌, 뜻밖의 인물이라며 세상 사람들이 놀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나와 KBS의 인연은 꽤 오래 된 것이다. KBS가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취임 직후 TBC 동아방송 등을 통합해 공영방송으로서 새 출발을 할 때부터 나는 KBS 사회교육방송의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또 1981년 12월8일 KBS 주최로 KBS의 모든 간부들과 방송 전문가들을 모아놓고 세종문화회관에서 '국민이 바라는 방송'이라는 주제로 큰 공개세미나가 열렸는데 그때 주제강연을 했다. 관련 논문도 몇 편 썼다. 몇 해에 걸쳐 사회교육방송에 매주 한번씩 고정 출연한 인연도 있다.
11월4일 취임식에서 나는 직접 준비한 취임사를 통해 인간존엄성 회복, 민주화와 공정한 여론 형성, 건전한 오락과 정서문화의 창조, 민족의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의 함양, 세계화 속의 선진성 구현 등 5가지 기본과제를 제시하고 KBS를 국민의 방송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새로운 사훈으로서 인간화, 민주화, 세계화 세가지를 밝혔다
/서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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