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의 밤에는 잠옷 하나에도 퍽 신경이 쓰였다. 가느다란 어깨끈이 달린 실크 원피스 잠옷은 으레 가슴부위가 속이 살짝 비치는 레이스로 장식되어있었고 하다못해 드로어즈(여성용 속바지) 밑단에도 레이스가 물결쳤다. 닭살스럽다고 웃지 마시라. 홈쇼핑업계의 효자상품인 여성용 란제리의 힘이란 결국 화려한 레이스 장식이 자아내는 은밀하고 섹시한 판타지에 바탕을 둔 것이다. 더구나 올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으로 예상되는 노출패션은 란제리를 아예 겉옷의 영역으로 끌고나왔다. 화려한 레이스로 한껏 무장한 란제리룩은 이제 겉옷과 속옷의 경계를 허물며 옷차림에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속삭인다.
풍경- 속옷이 아닌 속옷들
회사원 김영아씨는 얼마전 한 저녁모임에서 패션리더로 각광받았다. 검정색 재킷 속에 대담한 뷔스티에(Bustier)를 입은 것이 눈길을 모았다. 뷔스티에는 브래지어와 코르셋이 연결된 형태의 상의다.
“요즘은 그냥 민소매 원피스로는 멋지다 소리를 듣기 어려워요. 일상적이니까요. 뷔스티에나 란제리 탑 정도는 입어야 비로소 트렌디하다고들 하지요.”
노출패션이 일상화하면서 속옷 같은 겉옷들이 유행의 최전선에 나서고있다. 베스띠벨리 디장니실 박성희 실장은 “로맨틱한 여성미를 강조하는 트렌드에 몸짱열풍이 더해지면서 더 여성스럽고 더 자극적으로 몸매를 드러내려는 욕구가 전형적인 속옷인 란제리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란제리룩은 여러 종류의 여성 속옷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겉옷으로 디자인한 스타일을 말한다. 어깨끈이 달리거나 러닝셔츠 모양의 캐미솔(Camisole) 탑, 브래지어와 비슷한 브라 탑, 슬립(Slip)원피스, 브라와 코르셋이 연결된 듯한 모양의 뷔스티에 등이 주요 아이템이다.
대부분의 아이템들은 레이스 장식을 기본으로 한다. 가슴부위나 캐미솔 탑의 밑단, 슬립원피스의 밑단 등에 빠짐없이 레이스를 단다. 제 천과 똑 같은 색상의 레이스를 다는 것은 무난한 종류에 속하고 녹색 원단에 노랑 레이스나 잔잔한 꽃무늬 런닝셔츠에 검정색 레이스를 덧대는 등 독특한 배색효과를 노린 것도 많다. 이 레이스에 스팽글이나 크리스탈을 달아서 반짝이 효과까지 내면 시크한 멋은 더 살아난다.
여성주의 상징에서 일상의 패션으로
란제리 룩의 시작은 1980년대 마돈나 패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성패션연구소 서정미 수석은 “프랑스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가 세계 순회공연에 나선 마돈나를 위해 제작한 충격적인 뷔스티에룩 이후 ‘속옷의 겉옷화’는 패션계의 핫 이슈로 자리매김했다”고 말한다. 공격적인 금속 고깔모양 브라컵 뷔스티에와 검정색 울트라 미니팬츠로 구성된 마돈나 패션은 여성의 활발한 사회진출과 맞물려 기성세대의 소극적이고 순응적인 여성상을 전복하겠다는 선언적 의미를 담은 것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속옷을 겉에 꺼내입는 발상의 전환은 90년대 다양한 형식실험을 거쳐 ‘옷입기의 재미’를 추구하는 2000년대 들어서는 일상의 패션으로 정착하는 단계다. 패션칼럼니스트 조명숙씨는 “여성의 노출을 보는 시선이 관대해지고 여성 스스로 남의 시선보다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 옷을 입을만큼 자유로워지면서 속옷의 겉옷화나 반대로 겉옷의 속옷화 등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지고있다”고 분석했다.
믹스 & 매치, 그리고 겹쳐입기
란제리 룩의 이율배반은 정말 란제리 처럼은 보이지 말아야한다는 것이다. 강력하게 추천되는 연출법은 상반된 느낌의 소재와 연출하는 믹스&매치다. 하늘하늘한 시폰 란제리 탑을 흰색 데님팬츠, 청재킷 등 다소 투박한 느낌의 캐주얼 의상과 조화시키면 무난하면서 멋스럽다.
물론 몸매를 드러내는 란제리 원피스 만으로도 반짝이가 달린 망사 스카프를 길게 늘이면서 성숙한 분위기를 낼 수 있지만 패션 고수가 아니면 좀 부담스럽다. 이럴 때 추천되는 연출법이 레이어드(겹쳐입기). 란제리 원피스에 청바지나 타이트한 레깅스를 겹쳐입고 재킷을 걸치면 세련되고 재미있는 옷차림이 될 수 있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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