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고 튀는 것이라야 눈길을 붙잡는 요즘 같은 세상에 거문고 가락의 점잖고 묵직한 맛은 심심하고 고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거문고를 일러 '백악지장'(百樂之丈), 즉 모든 음악의 으뜸이라 부르며 항상 가까이 두고 사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방편으로 삼았던 조선 선비들의 풍류가 아득한 전설처럼 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정신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일상에 숨이 턱 막힌다 싶으면 문득 그리워지는 것이 거문고 소리다. 그 깊고 그윽한 소리는 밋밋하게 닳아버린 마음에 굵은 선을 그리며 고랑을 일구곤 한다. 그리하여 한 걸음 물러나 숨을 고르는 여유가 내 것이 된다.
거문고와 해금의 명인 김영재(57·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원장)씨가 신쾌동류 거문고산조로 음반(신나라뮤직 발매)을 냈다. 연주시간 67분 13초의 전바탕 녹음이다. 다스름―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엇모리―자진모리의 여섯 악장이 쉼 없이 이어져 한 곡을 이루는 긴 호흡이 분주한 일상에 쉼표를 찍는다. 거문고산조는 신쾌동류와 한갑득류가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데, 섬세하고 다채로운 가락이 특징인 한갑득류와 달리 신쾌동류는 힘있고 선이 굵은 가락으로 짜여져 있어 호쾌한 맛이 난다.
김영재는 신쾌동이 가장 아끼던 제자다. 14세 때인 1961년 국악예술학교에 입학하면서 신쾌동을 만나 거문고에 입문했다. 거문고를 처음 익히느라 손가락이 부풀고 피부가 벗겨져 쓰라리고 아플 때면, 어린 제자의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거문고 이야기를 들려주던 자상한 스승 신쾌동은 1977년 세상을 뜰 때까지 정성을 다해 그를 가르쳤다. 그렇게 스승에게 물려받아 평생 연마해온 거문고산조의 정수가 이번 음반에 담겼다. "거문고는 오른손에 쥔 술대로 줄을 내려치면서 왼손으로는 줄을 사선으로 밀며 눌러야 하기 때문에 다른 악기보다 연주하는 데 힘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나이가 드니 체력이 딸리는 것을 느낍니다. 제대로 연주할 수 있을 때, 더 늦기 전에 녹음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음반을 내놓게 됐지요."
국악기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것이 가야금이고, 그 다음이 해금이다. 화사하면서 재기 발랄하게 뛰놀 줄도 아는 가야금이나 변화무쌍한 표정과 음색을 지닌 해금과 달리 거친 듯 투박한 소리를 지닌 거문고는 별로 대중적이지 않다. 그는 "요즘은 그저 달콤하고 매끈한 소리만 좋아해서 그런 모양"이라며 아쉬워한다.
그는 거문고와 해금으로 일가를 이뤘을 뿐 아니라, 관악기를 뺀 거의 모든 국악기에 두루 능하다. 특히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거문고병창을 하는 이로는 그가 거의 유일하다. 국악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거문고·해금·가야금 등을 위한 기악곡 외에 무용·연극 등의 무대음악, 성악곡도 많이 썼다.
이번 음반은 그가 평생 가꿔온 음악세계를 CD로 담아내는 정리작업의 출발이기도 하다. "해금산조 전바탕, 병창, 창작곡 음반을 차례로 내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기본 자료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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