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이렇게 단순하다면 얼마나 좋을까."SBS 월화드라마 '2004 인간시장'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가진 거라곤 이글이글 불타는 정의감과 거친 주먹뿐인 스물 여덟 열혈남아 장총찬(김상경)의 대활약에 후련하기는커녕, 쓴웃음이 나오는 것은 왜일까.
김홍신씨의 소설 '인간시장'을 각색한 이 작품은 오랜만에 보는 '세태풍자' 드라마라는 이유만으로도 큰 관심이 쏠렸다. 로커 김경호가 부른 주제가 '심판의 날'에 담긴 메시지가 17대 총선정국과 맞물려 '총선 특수'를 점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다.
10% 안팎에 머문 초라한 시청률 때문만이 아니다. 몇몇을 빼고는 배역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듯한 어설픈 연기, 멜로와 활극 사이를 갈팡질팡하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살리지 못한 극본과 연출이 빚어낸 부조화에 짜증이 난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세태풍자'라는 간판이 무색하게 세상읽기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1980년대 소설 '인간시장'이, 그리고 박상원이 주연한 MBC '인간시장'이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당대 대중의 욕구를 잘 짚어냈기 때문이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조차도 감옥 행을 각오한 용기가 필요했던 폭압의 시대를 향해 날린 장총찬의 주먹은, 눈 감고 귀 막고 입 닫고 살아야 했던 소시민들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달라졌다. 여전히 악당이 존재하지만, 그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방식은 훨씬 교묘하다. 또 웬만한 악당쯤은 영웅을 불러낼 것까지 없이, 시민의 힘으로 혹은 법의 힘으로 단죄할 수 있다. 그런데도 '2004 인간시장'의 장총찬은 20년 전과 같은, 아니 더 무식한 방법으로(박상원이 그린 장총찬은 꽤 이성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악에 맞선다. 더구나 그가 평소엔 어리버리하기 짝이 없다가도 결정적 순간 CIA요원 뺨치는 정보수집 능력을 발휘하는 똘마니들 덕에 악당들의 얽히고 설킨 먹이사슬 관계를 훤히 꿰뚫고, 악의 소굴에 손쉽게 잠입할 수 있게 되는 대목에 이르면 코미디가 따로 없다.
"잘못하면 맞아야 한다"는 신념을 지닌 듯 앞뒤 잴 것 없이 주먹부터 날려대는 장총찬이 '영웅'이라면, 이 시대는 더 이상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장총찬이 악당과 맞장 뜰 때마다 내뱉는 "나? 대한민국 청년 장총찬이야!"라는 외침이 공허하기만 하다. 마치 "나? 오래 전에 죽은 장총찬이야!"라고 부르짖는 것처럼. '장총찬식 영웅'과 함께 세태풍자 드라마의 생명도 다한 걸까.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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