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니 설국(雪國)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환해졌다. 신호소 앞에서 기차가 멈춰섰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중편 소설 '설국'은 이렇게 시작된다. 새로운 세계와의 신선한 조우를 컴컴한 터널과 대비시킨 뒤 흰 눈 쌓인 별천지로 안내하는 소설의 독특한 구조가 꽤나 인상적이었다 접경의>
오래 전 읽은 소설의 모두(冒頭)가 새삼 떠오른 것은 선거가 끝난 후 각 정당 내부에서 일고 있는 정체성 논란 때문인 듯 싶다. <선거라는 긴 터널을 빠져 나오니 이데올로기의 세상이 펼쳐진> 구조가 소설의 첫머리와 유사했기 때문일까. 여야의 이데올로기 논쟁은 백가쟁명이 따로 없는 형국이다. 선거라는>
한나라당의 당선자 연찬회에서는 "한 클릭 왼쪽으로 옮기자"는 주장과 "보수정당으로 똑바로 가면 된다"는 주장이 맞섰다. 소장파들은 워크숍에서 당의 이념을 '개혁적 중도보수'로 규정했다. 박근혜 대표는 "보수가 뭐가 나쁘냐"며 보수(保守)의 보수(補修)론까지 들고 나왔다. 열린우리당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정동영 의장의 '실용정당'발언에 개혁당 출신 인사들이 반발하고 나서면서 '중도 진보', '개혁 실용', '개혁 보수' 등 개념조차 혼란스러운 용어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념 논쟁 자체를 나무랄 수야 없다. 각 정당이 가야 할 길과 정체성을 재정립할 시기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민주노동당 같은 좌파 정당이 원내에 진출한 만큼, 자기 색깔을 내기 위한 안간힘이라도 써야 한다는 정치적 사정을 도외시하자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념 논쟁을 지켜보는 국민은 불안하기만 하다. 정당의 이념을 규정하는 용어 자체가 모호한데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펼 것인지 가늠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총선 당선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중도진보·중도·중도보수성향의 사람들이 90%였다. 여 야로 나뉘어 진보니 보수니 하고 차별화를 꾀하고 있지만, 결국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 도토리 키재기식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말장난만 하고 있는 셈이다.
국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와 관계가 없는 정치권의 논쟁은 공허하고 소모적이다. 일자리를 어떤 식으로 늘리고 침체된 경기를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지, 도산위기에 내몰린 중소기업들을 살릴 방법은 무엇인지를 언급하지 않는 이념 논쟁은 말의 성찬에 불과하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사회에 나서는 순간부터 어깨가 처져 있는 젊은이들에게 중도 진보와 개혁보수가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냉전시대의 유산인 낡은 이념으로 무장하고 상대방을 공박해 국지적 승리를 거뒀다고 즐거워하기에는 처해 있는 경제 현실이 너무 벅차다. 세계의 경제대국 치고 글로벌 경쟁시대에 이처럼 한가한 논쟁을 벌이는 나라가 또 있을까.
중국의 긴축정책으로 올 해 경제성장률과 수출에 이미 빨간 불이 켜진 상태다. 우리나라는 중국쇼크의 최대 피해자가 될 조짐이 농후하다. 1996년 국민소득 1만 달러에 들어서고도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을 일본의 장기불황에 빗대 '잃어버린 8년'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올 해 안에 기업들이 무더기 도산하는 중소기업 대란이 닥칠 것이라는 불길한 시나리오마저 떠 돌고 있는 요즘이다.
철 지난 이념논쟁보다는 국가경쟁력과 대외신인도를 높이고 국부를 키우는 방법에 대한 정책토론이 아쉽다.
/이창민 산업부장 cm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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