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어느날 흥사단의 대 선배이며, 공의회장도 지내신 김선량(金善亮) 황해도 명예지사께서 나에게 유명한 독립운동가 김마리아(金瑪利亞·1891∼1944) 열사를 아느냐고 물었다. 김 지사는 "김마리아 열사야말로 어떤 독립운동가보다 인격이 탁월하고 공이 큰 여성"이라며 열사의 기념사업을 하려는데 기념사업회가 여성들로만 구성돼 사업이 잘 안되니 나더러 나서서 좀 도와주라는 것이었다. 이미 기념사업회 회장인 고황경(高凰京) 서울여대 총장에게는 내 얘기를 했다고 했다.며칠 후 김 지사는 고 총장을 모시고 흥사단 이사장 사무실로 나를 찾아 왔다. 고 총장은 여성으로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미 해방 전부터 여성계의 최고 지성으로 알려진 분이다. 김 열사와는 먼 외척관계라고 했다. 이 두 분의 권고를 받고 나는 기념사업을 돕기로 했다.
김 열사는 황해도 장연 출신으로 유명한 교육자 김필례(金弼禮) 여사, 김규식(金奎植) 선생의 부인 김순애(金順愛) 여사 등이 그의 고모다. 연동여학교(현재의 정신여중고)를 졸업하고 광주 수피아여학교와 모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일본으로 유학, 1919년 2·8독립선언에 가담했다. 귀국 후 비밀조직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 회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뒤 지독한 고문을 받고 3년형을 선고 받는다. 병 보석으로 풀려나자 조각배 타고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파크대 문학부, 시카고대 사회학과에서 수학했다. 미국에서 신학공부까지 하고 1932년 귀국해 원산의 마르타 윌슨신학교 교수로 있던 중 고문후유증인 골수병으로 해방을 1년 앞두고 별세했다. 그를 잘 아는 백낙준(白樂濬) 박사 등의 증언에 따르면 수많은 독립운동가 중 인격 지도력 활동력으로 가장 탁월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국민 사이에 그 분의 이름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후손이 없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기념사업회 회의에 나가보니 한글학자 한갑수(韓甲洙)씨, 이화여고 교감을 한 신봉조(辛鳳祚)씨, 전택부(全澤鳧) YMCA총무와 김 열사의 출신교인 정신여고 동창회 간부 및 김 열사가 근무한 원산 마르타 윌슨신학교 동창회 간부들이 회원이었다. 내가 나간 첫번 모임에서 나를 부회장으로 선출했다. 동상 건립 비용을 모금하고 서울시 등 행정당국과 교섭하는 일 등에 내가 적임자라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정신여고 동창회와 학생들이 모금한 액수가 약 3,000만원이었다. 동상 세우는 비용은 1억원 정도 드는데 돈이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김 열사의 본관이 광산(光山)이라는 것을 알고 김용순(金容珣) 광산김씨 종친회장을 찾아가 협조를 구했더니 부회장인 김우중(金宇中) 대우그룹 회장을 만나보라고 했다. 1988년 10월 내가 KBS사장에 선임될 즈음이었다. 어느 날 김 회장 부인 정희자(鄭喜子) 여사가 대한적십자사 여성봉사자문위원장 자격으로 나를 찾아왔길래 동상얘기를 하고 협조를 구했다.
얼마 후 어떤 파티석상에서 김 회장을 직접 만날 기회가 생겼다. 김 회장은 2, 3년 전에 내가 안병욱(安秉煜) 선배와 함께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 전기 100만부 보급운동을 할 때 만난 적이 있었다. 다른 기업들이 1,000∼2,000부를 사줄 때 김 회장은 제일 많은 1만부를 사주었다. 동상 얘기를 꺼냈더니 첫마디에 "얼마나 모자라냐"고 물어 "한 3000만원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그거 다 내가 내지요"하고 선선히 승낙하는 것이었다. 그 때 마침 정신여고 출신의 여류조각가 김정숙(金貞淑) 여사가 실비만 받고 최선을 다해 제작하겠다고 해 6,000여만원이면 동상을 세울 수 있게 된 상황이었다. 나는 김 회장이 그 자리에서 첫마디에 선선히 승낙하는 것을 보고 "대단한 사람이다, 통이 큰 사람이구나"라고 감동했다.
이렇게 해서 1989년 가을에 보라매공원에 김 열사의 동상을 세우고 그의 훌륭한 민족사랑, 나라사랑의 정신을 전할 수 있게 됐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