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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포츠 50년]"57세에 뒤늦게 프로무대 이름 내밀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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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포츠 50년]"57세에 뒤늦게 프로무대 이름 내밀었죠"

입력
2004.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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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사람/前축구국가대표 박이천71년 제1회 박대통령배 아시아축구 개막전. 5월초의 쾌청한 날씨에 첫 국제대회를 즐기기 위해 모여 든 3만 관중과 TV 앞의 시청자들은 이날도 어김없이 한국축구의 문전처리 미숙에 가슴을 쳐야 했다. 한국이 태국 골문을 향해 날린 슛은 무려 30개. 코너킥도 17개나 되는 일방적 공세에도 불구, 성공한 것은 단 1개 뿐이었다. 모처럼 대통령 앞에서 뛴 대표팀의 체면을 간신히 살린 주인공은 후반 28분 태국의 밀집 방어망을 뚫고 헤딩슛을 쏜 박이천. 168㎝의 작은 키이지만 질풍 같은 돌파와 순발력에 기습 터닝슛을 자랑하는 그는 수비에 김호-김정남 콤비가 있듯이 공격에서 이회택과 호흡을 맞춰 70년대 전반 한국축구를 이끈 골게터였다.

이후 이회택 김호 김정남이 프로축구와 국가대표팀을 지휘하며 지도자로서도 화려한 인생을 살아 온 반면 팬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박이천은 금년 57세의 나이로 프로무대에 얼굴을 내밀었다. 직책은 프로축구 막내 팀 '인천 유나이티드'의 기술고문.

75년 광운전공의 창단감독을 제의 받고 국민은행에서 유니폼을 벗은 그는 선수생활에 대한 미련 때문에 홍콩 세미프로팀으로 진출, 3년을 뛰었다. 그리고 80년 사우디로 가서 한국건설업체를 상대로 식품 공급업을 하고, 국내에 돌아와서는 음식점을 운영해 보았으나 모두 오래 못 가 접어야 했다.

결국 86년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겠다"며 부천 정명고 창단감독을 맡고는 조용히 16년을 한 곳에 몸담았다.

선수시절 만큼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팀은 3년 만에 전국체전에서 준우승하고, 2000년 문화관광부장관배 우승을 차지하는 등 거의 전국 3위권을 유지했다. 또 인근의 역곡중 여월중 동곡초 계남초 부인초교에 팀을 만들어 축구 불모지였던 부천을 축구도시로 변모시키고, 유소년을 상대로 한 '박이천 축구교실'을 10년 넘게 운영하고 있다.

장현호(전 포항) 이기형 김대의 (이상 수원삼성) 최성국(울산현대) 박재홍(전북현대) 김영삼(고려대)등이 정명고에서 키운 대표적 제자이다.

그는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라는 점이 학부모와 선수들의 신뢰를 얻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하지만 주위에서는 축구 못 지 않게 인성과 학과교육을 중시하는 그의 소신이 선수들을 모이게 했다고 평가한다.

박감독은 경기가 없을 때는 선수들이 오전부터 모든 수업을 듣도록 했다. 2년 전부터는 뉴질랜드인을 데려다가 선수들에게만 매일 한시간씩 영어를 가르쳤다.

"축구부원 30명중 축구로 성공할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습니다. 다른 길을 택하게 될 선수들도 생각해 줘야죠. 일반 학생들보다 학력이 떨어지는 대신 영어 하나라도 확실히 배우면 평생 써 먹을 수 있고 축구로 외국에 진출하거나 국제심판이 되더라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지금과 같이 지방을 떠돌며 1년에 대회를 8개씩이나 참가하다 보면 공부는 불가능하다며 교육부가 내년부터는 3개 이상 출전하지 못하도록 강제규정을 만든 것을 적극 환영했다. "재능 있는 선수는 수업을 마치고 오후 3시 이후에 훈련을 해도 충분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인천에서 그의 역할은 스카우트. 우수 선수를 끌어 모으는 게 급선무인 신생 팀에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며, 오랜 고교 지도자 생활로 현역 선수 모두를 꿰뚫고 있는 박감독은 누구보다 적임자이다. 19세이하 대표 출신인 고졸 선수 이요한 이근호와 대학 출신, 프로 최강 성남일화의 김현수등 자유계약선수들이 그의 손에 이끌려 인천에 입단했다.

"늦었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독일감독의 선진적인 선수관리와 지도방법을 곁에서 보고 싶고 최고 수준인 프로축구의 생리도 알고 싶어 왔습니다."

기왕 프로 팀에 몸담았으니 감독도 해봐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에는 "모두 순리대로 하겠다"고 대답한다.

그라운드에서의 표범같던 이미지와는 달리 내성적이고 온순한 성격의 그는 이제껏 한번도 큰 돈을 벌어 본 적이 없으나 그래도 고교축구에서는 후배 지도자를 만나면 반드시 소주 한잔을 사주는 정 많은 '큰 형님'으로 평이 나 있다.

/유석근 편집위원

■1967년 5월 3일/장기영 한국일보 사주 IOC위원 선임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직을 마치고 66년 6월 갑작스럽게 작고한 이상백 박사 후임으로 KOC(대한올림픽위) 위원장을 맡게 된 장기영 한국일보 발행인은 곧 AGF(아시아경기연맹) 회장에 오르고, 다음해 테헤란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한국인으로는 이기붕 이상백에 이어 세번째의 위원으로 선임됐다.

이미 61년 대한축구협회 회장 시절 월드컵 예선을 위해 축구대표팀을 이끌고 유고에 원정, 처음 공산권과의 체육외교를 펼쳤던 그는 IOC위원이 된 후에는 올림픽에서 우리의 공식호칭을 '코리아'로 못박는 등 한국의 지위를 공고히 하며 올림픽을 정치에 이용하려는 공산권의 시도를 저지하는 데 앞장섰다.

장위원은 67년에는 언론인으로서 신인체육상을 제정, 우수선수 발굴에 힘쓰는 한편 69년 국내 첫 스포츠 전문지 일간스포츠를 창간, 스포츠의 보급 및 저변확대에 지대한 공을 세우고 77년 4월 IOC 위원이 된 지 10년 만에 6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969년 5월3일/7개 은행팀 금융단 축구리그 탄생

은행 축구팀의 창단이 봇물을 이루며 한국축구가 대도약의 계기를 맞았다.

무더기 창단의 산파는 현직 재무부 이재국장인 장덕진씨였다. 68년 대한축구협회 집행부가 개편되면서 새로 재무이사가 된 장씨는 고시 3과(사법 행정 외무)에 합격한 엘리트 소장관료로서 영부인 육영수여사의 친정 조카라는 배경까지 갖고 있던 실력자.

축구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주말이면 직접 볼을 차며 이재국과 이재국의 감독을 받는 은행의 직원들 사이에 축구붐을 일으켰던 그는 축구협회에 영입된 후 금융계에 축구발전을 위한 협조를 당부했고, 당시 박신자를 앞세워 여자농구 최강을 지키던 상업은행의 1월 창단을 필두로 주택 조흥 외환 신탁 제일 산업은행까지 순식간에 7개 팀이 만들어져 금융단리그를 갖게 됐다.

5월부터 12월까지 6차에 걸쳐 리그전을 벌인 첫해의 종합 1위는 군복무를 마친 김호와 갓 고교를 졸업한 김호곤을 스카우트해 철벽 수비를 구축한 상업은행. 갑작스런 창단 붐으로 스카우트 경쟁과 선수부족 사태가 벌어지는 가운데 금융단 축구팀은 13개 은행중 한국은행을 제외한 12개 은행과 자동차 보험을 합하여 13개로 늘어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71년 5월 2일/박대통령배 국제축구 팡파르

장덕진씨의 또 하나의 작품은 국내의 첫 국제대회인 '박대통령배 쟁탈 아시아 축구대회'.

70년 1월 재무차관보로서 대한축구협회장을 맡은 그는 11월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공동우승을 차지한데 고무되어 "아시아 규모의 대회를 창설해 해마다 개최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부랴부랴 대회를 준비, 5개월 여만에 서울(동대문)운동장에서 8개국이 출전하는 대회를 열게 되었다.

이회택 박이천 김호 김정남 정강지 이세연 정규풍 박수덕등으로 구성된 한국대표 1진 청룡은 태국 말레이시아 크메르 인도네시아를 물리친 후 마지막에 아시안게임 공동우승팀 버마와 맞서 결승전과 재경기를 모두 0-0으로 비기고 다시 공동우승을 이루었다. 아시안게임 결승전을 포함하여 5시간 50분의 열전에서 두 팀은 한 골도 뽑지 못한 것.

버마는 2회대회 단독우승, 3회 공동우승으로 초창기 최강팀으로 군림했으며 한국은 4회 대회서 첫 단독우승을 따냈다.

메르데카배(말레이시아) 킹스컵(태국)과 함께 아시아 3대 이벤트의 하나였던 이 대회는 76년 6회부터 유럽 남미 강호를 초청, 아시아대회에서 국제대회로 성장했고 95년 코리아컵으로 새출발했다. s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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