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칠수1963년 경기 파주 기지촌 출생. 고교 때 서울로 가출. 여러 곳을 기웃거리다가 극장과 거리 간판 그리는 일에 나섰다. 쉬는 날 에로영화 6편을 내리 보는 게 취미. 연대 미대생을 사칭, 음대생을 사귀려다가 부녀자 희롱으로 구류를 살기도 했다. 오줌 누러 20층 빌딩 옥상에 올라갔다 시위자로 오인한 경찰과 대치중 추락. 경찰이 쳐놓은 그물망에 떨어졌을 수도 있으나 생사 미확인.
박만수
1962년 충남 보령 수부리 태생. 3대째 머슴을 살던 집안 출신으로 5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중학교를 마치고 읍내 극장에서 간판장이를 하다가 서울로 왔다. 변두리 극장을 전전하며 간판을 그렸다. 세끼 라면만 먹으며 돈을 모으는 성실파. 빌딩 옥상에서 실수로 깡통을 떨어뜨려 대형 교통사고를 낸다. 역시 투신자살 또는 폭력시위로 오인한 경찰과 대치하다 추락.
페인트 칠을 하다 말고 20층 건물 옥상 위에서 세상을 향해 오줌을 싸고, 욕설을 내뱉는 칠수와 만수. 요즘으로 말하면 비정규직 두 노동자의 욕지거리와 고함 소리에 관객이 이토록 열광한 적은 없었다. 노동자를 '우리시대 주인공'으로 띄운 연우무대의 연극 '칠수와 만수'(오종우 작·이상우 연출)의 주인공 칠수와 만수는 그때 죽었을까. 중년이 된 두 사람이 연극을 공연했던 신촌의 옛 연우소극장 근처 소주집에서 만나 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엿보았다.
# 18년 후
칠수 야, 반갑다. 신수가 훤하구나. 애가 벌써 중학교 들어가고, 치킨체인점도 차렸다며? 너 성공할 줄 알았어. 매일 임춘애 선수처럼 세 끼 라면만 먹고, 매달 5만원씩 꼬박꼬박 저축했잖아. 내가 돼지갈비 뜯고 소주 빨 때 말이야.
만수 선글라스는 또 뭐여, 하여튼 폼은 있는 대로 재는 게 18년 전이랑 똑같네 잉. 그래 너 보니까 옛날 생각난다. 뭐하고 먹고 사냐 시방?
칠수 복싱체육관 관장이잖냐. 내가 한 주먹 한 거 알지? 홍수환이 만큼은 못해도 잘 나갔지. 내가 배출한 세계, 동양챔피언만 꼽아도 한손이 모자란다. 그런데 요즘은 권투하겠다는 놈이 없어서 에어로빅 복싱 쪽으로 바꿨어.
만수 너 숨소리 빼곤 모두 '구라'라는 거, 그때 우리 뉴예술공사 직원들 다 알고 있던 거 알지? 그런데 음대 다니는 미숙이는 어떻게 된겨?
칠수 미숙이는 '꽝' 됐지 뭐. 연대 미대 다닌다고 뻥치다 걸렸잖아. 아, 씨팔, 홍대 미대 다닌다고 할 걸.
# 소리는 질러 봤다
만수 그래도 우리 보면서 사람들이 갑갑증을 풀었대잖어. 세상이 하 답답했으니께. 우리가 원시인처럼 버럭 소리 지르니까, 모두들 신난 것이었제.
칠수 하기는 그때 미문화원 점거다, 서울대생 분신이다 큰 사건이 이어졌으니 경찰도 눈이 시뻘갰지. 세상은 많이 바뀌었어. 우리 같은 놈들도 국회에 들어가고. 이제 누가 옥상 올라가면 그건 정부 반대 하는 게 아니라,우리도 일 자리를 달라 이런 거겠지. 대학나온 젊은 놈들도 일자리 없어 백수건달 되고, 나이 든 축은 일찍 쫓겨나니까.
만수 어쩔 것이냐. 아무도 '아니'라고 말 못하는데, 옥상에서 상소리라도 질러야 가슴의 멍이 풀리지. 우리가 인기 있으니까 뒤에 영화에도 나오더라. 네가 미숙이 쫓아다니는 꼴을 보니까 얼굴이 화끈거리대.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어도 중졸이랑 음대생 결혼은 힘들제.
칠수 야, 너 서태지가 중졸인 거 모르니? 학력이 아니라 실력이야. 민노당 노회찬 당선자도 '우리는 학벌없는 사회를 지향한다'고 했어. 우리가 지금도 현역에서 활약했으면 민중설치예술가 대접 받았을 지도 모르지. 그때 우리가 곤돌라 위에서 이민 갈 궁리도 하고, 한국은행 털 궁리도 했는데 그냥 디자인 쪽으로 계속 나갈 것 그랬어. 21세기는 '디자인 시대'라고 하는데 말이야.
만수 그래 그때 은행에서 200억원 털 생각 했는데, 막상 우리 호주머니 뒤지니까 200원 나왔잖아? 한국은행 터는 거 영화로도 만들었다며? 우리한테 저작권 있는 건데 연락이 없네. 네가 1억원이라며 복권 준 기억도 난다.
칠수 요즘으로 치면 로또야. 로또 되면 네 이름으로 치킨 전국체인점 차려줄게. 그리고 우리 만난 지 20주년 기념 파티(연극)나 하자.
# 자정 무렵
만수 근데 통 네 가족 이야긴 없다? 마누라라도 도망친 거 아녀?
칠수 야! 너 인간 장칠수를 어떻게 보는 거야(손가락질을 하다가 빈 소주병이 두어 개 엎어진다).
만수 내가 아무리 눈치 없기로 네 이야기도 모를 줄 알고? 작년에 총무과장을 길거리에서 만난 적 있어. 너 지금 애 고향 파주에 맡겨 놓고 혼자 있다며? 그러지 말고 우리 집으로 들어와. 그게 무슨 궁상이여.
칠수 잘난 척 하기는.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사기 당해서 쩔쩔매는 너한테 손 벌릴 줄 아니. 너 퇴직금으로 체인회사랑 가맹계약 맺었다가 몽땅 날렸다며.
만수 그거 재작년 이야기야. 이번 집은 다시 시작한 거야. 힘들지만 그럭저럭 꾸려갈 수는 있다니께. 20층 옥상에서 떨어져 살아난 놈이 뭔들 못하겠냐?
칠수 씨팔, 떨어지고 싶어 떨어졌냐? 내려갈 수도 없고 올라갈 수도 없으니까 그랬지. 우리 같은 놈 인생이란게 맨날 그 꼬라지 아니냐.(백열등이 갑자기 18년 전 경찰이 켜놓은 서치라이트처럼 보이는 두 사람. 갑자기 입을 벌린 채 멍해진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 "칠수와 만수"의 배우들
'칠수와 만수'의 배우들은 어떻게 됐을까. 바닥인생 역을 연기했지만, 실제 그들의 삶은 모두 '지붕 위의 인생'이 됐다.
문성근(51)은 충무로 주축 배우로 성장했고, 당시 신예였던 강신일(44)은 오랜 연극판 경력 끝에 최근 충무로 대표급 조연으로 떠올랐다.
서강대 무역학과 출신으로 건설회사에서 일하다가 뒤늦게 연극판에 뛰어든 문성근. 1985년 '한씨연대기'에 이은 '칠수와 만수'로 급부상했다. 이후 영화로 진출,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1990년)에서 위장 취업한 대학생을 연기하면서 '지식인 주연 연기자'로 자리잡았다. 그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는 SBS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 싶다' 진행자로서, 사회 저항적 기질은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운동과 노사모 회원으로서 노대통령 만들기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지난 3월 KBS '인물현대사' 진행 중도사퇴로 도덕성에 흠집을 냈고, 열린 우리당 국민참여 운동본부장으로 총선을 돕던 중 '열린 우리당은 잡탕'이라는 발언으로 또 한번 뉴스의 초점이 됐다. 연기보다는 정치 쪽에서 자주 얼굴을 보게 돼, 우리를 슬프게 하는 문성근. 그러나 연출가 이상우에게 '칠수와 만수 20년 후' 공연을 제안할 만큼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칠수가 살아있다.
강신일은 오랜 동안 대학로를 지켜왔다. 마흔 넘어서야 영화에 진출, '공공의 적'의 다혈질 형사반장, '광복절 특사'에서 자신의 보신에만 급급하는 교도소 보안과장, '실미도'에서 진중하면서도 강인한 훈련병 근재로 나와 선 굵은 연기를 보여줬다. 그리고는 올 초 '한씨연대기'로 연극무대로 다시 돌아갔다.
영화 '칠수와 만수'(1988년, 감독 박광수) 역시 안성기(52)와 박중훈(38)의 진가를 확인시켜 주었다.
1980년대 배창호 감독의 작품에서 주연을 도맡으며 국민배우로 떠오른 안성기는 오갈 데 없는 칠수를 묵묵히 받아주는 큰 형 같은 모습을 보여주며 신예 박중훈을 감싸는 듬직한 연기를 보여줬다. 피아노 줄에 의지해 까마득한 옥상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하는 연기인데도 태연하기 짝이 없다. 93년 박중훈과 다시 손을 잡고 '투 캅스'에서 황금 콤비를 보여주며 90년대에도 전성기를 구가했다. 한때 상투성으로 휘청이기도 했지만, 늘 스스로 겸손한 그의 자세는 '무사' '실미도' 에서 그를 '국민배우'로 거듭나게 했다.
철부지 하이틴스타 박중훈은 이 영화를 계기로 본격적 연기자 대열에 합류했고, 그의 코믹 연기는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 친구의 벤처기업에 투자해 수 백억원을 버는 대박의 꿈도 이뤘다. 빌딩에서 추락한 칠수와 만수가 그들에게 성공의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이종도기자
■그때 한국일보에는/"뛰어난 세태풍자" 찬사
연극평론가 서연호씨는 1986년 5월14일자에 "모순과 부조리와 허위에 가득찬 오늘의 현실에 대한 시사성 짙은 아이러니와 세태 풍자, 서민들의 생활주변을 생생하게 표현하면서 긴박감 있게 이끌어가는 작가와 연출가의 신선한 노력은 배역들의 열연과 더불어 오랜만에 창작극의 맛을 느끼게 해준다"고 평가했다. '칠수와 만수'는 한국일보가 연말에 평론가 5인에 의뢰해 뽑은 그 해 '베스트 연극 5'에도 뽑혔다. "올해 젊은이들의 박수를 많이 받은 작품이다. 세태를 풍자하는 서민들의 애환을 밀도있게 그려내 찬사를 받았으며 2만6,000여명의 관객을 동원했다"(12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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