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의장과 박근혜 대표가 여야 협약을 통해 상생의 정치를 국민 앞에 약속했다. 이제 더 이상 싸움을 안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서로를 도와주고 살려주는 상생의 정치를 해오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상생"의 정치를 시작하겠다고 내세우니 국민들은 어리둥절하고 당혹스럽기만 하다.총선을 한달 여 앞두고 한나라당은 무리하게 탄핵 소추안을 밀어붙여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을 급상승시켜 주었다. 이것이 너무도 고마웠던지 총선 기간 내내 열린우리당은 탄핵안을 철회하라고 한나라당에 요구했다. 만약 한나라당이 이를 못 이기는 척하고 받아들여 탄핵을 철회하고 노무현 대통령을 복귀시켜줬다면? 탄핵에 대한 분노와 반감 때문에 열린우리당에 일시적으로 쏠렸던 상당수의 국민들은 열린우리당을 계속 지지해야 하는 명분을 더 이상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반면 탄핵을 철회함으로써 대승적인 국민화합의 제스처와 자기반성의 모습을 보여준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급상승했을 것이고 아마도 이번 총선에서 제1당이 되는 승리의 기쁨을 누렸을 것이 거의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은 이를 거부함으로써 열린우리당을 끝까지 도와줬다.
17대 총선에 승리하여 정치적 명분을 획득한 열린우리당 입장에서는 이제 무조건 헌재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만약 헌재가 정상적인 탄핵심판과정을 거쳐 마침내 기각판결을 내린다면 노 대통령은 그 순간 대통령 선거에 다시 당선된 것에 버금가는 새로운 정치적 정당성과 권위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대국민 사죄와 한나라당의 용서를 통해 다시 청와대로 복귀하는 초라한 모습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 헌재가 파면결정을 내린다 해도 고민에 휩싸이게 될 것은 한나라당이지 열린우리당이 아니다. 노 대통령이 파면되어도 지금 현 정국에서 60일 이내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후보가 한나라당의 후보를 압도할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정동영 의장이든, 김근태 대표든, 아니면 그 누구든 간에 열린우리당의 대통령 후보는 노 대통령과 함께 선거유세를 다니게 될 것이다.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지 않는 사유로 인해 파면당한 "피해자" 노 대통령은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끌어낼 것이고, 열린우리당 대통령 후보의 승리는 곧 노무현의 승리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한편, 스스로 탄핵을 주도해서 대통령을 파면시킨 후 그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한번 더 패배하게 되는 한나라당은 정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잃게 되고 재집권의 가능성은 상당 기간 물 건너간 이야기가 될 것이다.
따라서 한나라당의 입장에선 어떻게 해서든지 헌재의 결정 전에 탄핵철회 의사를 정치적으로라도 천명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현실적으로 16대 임시국회의 소집과 의결로서의 탄핵철회가 이제는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한나라당 지도부가 탄핵철회의 입장을 정치적으로 밝히고 이러한 의견을 헌재에 지금이라도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탄핵철회의 입장 표명이 있은 후라면 헌재가 기각판결을 내려도 그것의 정치적 파괴력은 반감될 것이다.
총선 기간 그리고 총선 승리 후에도 열린우리당에서는 한나라당에 도움이 되는 탄핵의 정치적 철회를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이에 질세라 한나라당은 이러한 요구를 계속 거부하고 아예 탄핵에 관한 논의조차 회피하고 있다. 이처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서로를 위해주는 엄청난 자기 희생적 상생의 정치를 이미 줄기차게 해오고 있는 것이다.
정당정치의 핵심은 각 정당이 서로 다른 정책적 대안을 놓고 싸우는데 있다. 필요한 사안에 대해 제대로 된 방식으로 생산적인 싸움을 하는 여야의 모습은 언제쯤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인가.
/김주환 연세대 신방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