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어느날 서울 강남의 한 식당이었다. 가수 최백호씨를 비롯해 과학자, 교수, 예술인, 회사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 수십 명이 모여들었다. 주로 40, 50대로 보이는 이들을 한자리로 불러 모은 것은 '라이파이'라는 만화였다.1960년대 한국만화를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인 '라이파이'를 잊지 못하고 여전히 '라이파이'를 통해 소년, 소녀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알음 알음 안부를 나누다가 작은 동호회를 만들기 위해 모인 것이다. 인터넷에 동호회 사이트를 열고 작은 전시회를 마련했으며, 작가 김산호 선생을 모시고 만화를 읽던 어린시절의 감상을 이야기했다. 즐거워하는 그들의 눈빛은, 머리카락이 반백으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천상 아이들의 그것이었다.
'라이파이'는 '슈퍼맨' 등 미국산 만화 캐릭터가 세계적 인기를 모으던 60년대, 우리나라에도 한국을 대표하는 영웅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는 김산호 선생의 작가적 자존심에 의해 탄생했다. 두건과 망토를 펄럭이며 우주선 제비호를 타고 악당을 무찌르는 '라이파이'의 무용담은, 그 무렵 어린이들을 사로잡은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였다. 이 글을 읽는 40, 50대 독자 가운데 '라이파이' 신간이 나오는 날, 아이들이 이른 아침부터 동네 만화가게 앞에 줄 서 기다리던 풍경을 떠올리는 이도 있을 것 같다.
'라이파이'를 잊지 못해 모인 동호회 회원들은 '내 인생의 라이파이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어떤 이는 '라이파이'의 제비호를 실제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과학자가 됐다고 했고, 환경운동을 하는 이는 지구와 자연을 사랑한 '라이파이'의 마음을 잊지 않고 살고 있다고 했다. 가수 최백호씨는 자신의 가수 인생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라이파이'의 주제가를 헌정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라이파이'의 모험은 우리 사회가 감당할 산업화의 진통을 상징했고, '라이파이'의 싸움은 밝은 내일을 위해 고단한 일상과 싸웠던 청소년들의 하루 하루였으며, '라이파이'의 승리는 곧 미래의 희망으로 읽혔을 터였다. 우리사회가 산업화의 길을 걷던 시절,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에게 이 만화는 현실의 불안을 견딜 힘이자, 내일의 희망이 어떤 모습일지 가늠하게 만든 거울이었다.
모든 대중문화가 그러하듯 만화도 우리 삶의 모습을 투영한다. 만화 '라이파이'는 60년대의 꿈과 희망을 투영한다. 그리고 그 꿈과 희망은 스스로 '라이파이' 이고자 했던 세대의 노력을 통해 이즈음 번듯한 21세기를 만들었다. 만화는 이렇게 세상과 소통한다.
박군/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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