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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다시본다]<16> 3부 변화하는 정치·국가전략 ④ 저무는 좌파, 고개드는 우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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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다시본다]<16> 3부 변화하는 정치·국가전략 ④ 저무는 좌파, 고개드는 우익

입력
2004.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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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와 사람들의 몸을 휘감은 띠들, 마이크를 통해 울려 나오는 외침은 일본 어느 곳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거리 풍경의 한 부분이다. 우파(右派)들의 '우국(憂國)'의 모습이다. 종전 후 이들은 다소 희화화(戱畵化)됐었다. 정상에서 벗어나 있으나, 사회질서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 '열혈 애국자'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어느 사이엔가 일본사회에 널리 퍼져가고 있다. 이들의 한결같은 천황제 수호의 이념이 새삼스럽게 일본사회에서 힘을 받게 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시민사회의 성장과 맞물려 있다.정부 주도의 일본 근대화는 끊임없이 전쟁을 준비하는 군국주의화 과정과 함께 이루어졌으므로, 세계 전체의 추세였던 1910∼30년대의 사회주의 및 노동운동은 압도적인 정부에 의해 궤멸됐고, 시민사회에서 성장한 우파운동은 곧바로 정부에 흡수됐다. 전후 민주개혁에 의해 되살아난 좌파 사회운동과 학생운동은 1955년 자민당 체제의 출범 후 신좌파의 이름을 얻으며 성격을 변화시키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노동운동도 대부분 체제내화했다.

전후 개혁이 이루어진 잠시 후 다시 진전된 역코스(보수화)와 한국전쟁을 계기로 우파가 살아나기 시작했으나, 그런 중에도 우파가 희화화되었던 것은 전후 일본 사회운동의 이념적 색채가 짙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960∼70년대에 등장했던 주민운동과 혁신자치체, 베트남전 반대운동, 우먼리브 (여성운동) 등은 급진적 시민운동의 수명이 얼마나 짧은지를 확인시키고 곧 사라졌다. 경제성장과 정치적 안정을 딛고 자라난 시민사회는 매우 견실한 생활운동을 발전시켜왔을 뿐이다. 생협(生協·생활협동조합)운동이나 자원(自願)활동, 보육운동 등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생활운동은 이렇게 좌와 우를 양쪽 한편으로 몰아붙이고 폭 넓게 시민사회를 탈이념화시켜 왔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변화시키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 일본 외부로부터 가해진 충격이었다. 한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피해국들로부터의 전쟁책임 추궁은 일본의 윤리적 입지를 엄청나게 흔들면서 사회운동의 지형을 급속히 바꾸어 갔다. 일차적으로 극히 소규모의 학습회 형태로 명맥을 이어온 비판적 그룹들이 아시아 시민단체들과 협력하면서 새롭게 전쟁책임 운동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여성단체, 재일한국인, 평화운동, 지식인, 법률가들이 대거 참여한 이 움직임은 전후 일본사회에서 볼 수 없던 매우 특이한 모습이었다. 이들의 입장은 곧바로 천황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으므로, 이에 대한 보수적 집단의 대응은 또한 엄청난 힘으로 결집되기 시작했다. 막강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정치가, 지식인, 청년 등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일본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아시아 시민단체와 피해자들을 비하하고, 새로운 비판적 그룹의 행위를 매국적이라 비난했다. 이 움직임은 그간에 일본사회에 광범위하게 존재해 왔던 보수적 집단과 극단적인 우파 간의 간극을 메우는 시멘트 역할을 하면서, 일본사회의 우경화를 이끌었다. 탈이념적 시민운동은 건강한 일본사회를 키워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이렇게 우파의 예비군이기도 했던 것이다.

90년대 초 대립했던 이 두 세력의 균형은 해가 갈수록 형편없이 우파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일본군대위안부문제로 날카로워진 우파의 칼은 역사교과서문제에서 여지없이 힘을 발휘했다. 90년대 초 일본정부는 전쟁책임을 부분적으로 인정했고 교과서도 다소 수정했으나, 1994∼5년께를 기점으로 우선회(右旋回)했다. 일본정부는 전쟁책임을 부정하고 역사교과서를 다시 개악했다. 기미가요와 일장기 게양을 합법화하고 유사법안을 비롯한 일련의 법을 제정했으며 평화헌법 개정논의를 본격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파 사회운동은 날개를 달아, 새로운 역사교과서의 제작으로부터 폭력적인 평화운동 파괴로까지 번졌다.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를 위해 총리를 위시한 긴 행렬이 만들어지고, 신사 안의 유슈칸(游就館)이라는 박물관에서는 '명예로운' 민족, 일본을 다시 세우는 교육에 많은 시민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

다른 한편, 전쟁 책임을 위해 모였던 시민단체 중 많은 부분이 책임자 처벌과 같은 천황제와 관련된 사안에는 대거 등을 돌렸다. 무엇인가 변화의 희망을 갖는 사람보다는, 우파와의 싸움은 무망할 뿐 개인의 양심적 행동에 의미를 두는 소극적 참가자가 운동의 주류를 점하고 있다. 90년대 이후 계속되는 장기적인 경제침체는 이러한 우경화에 논리적·심리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일본사회는 이제 종신고용제 신화의 종언, 외국인 노동자의 대량 입국과 같은 굉음을 소화해야만 한다. 중무장한 중국이 과거문제에 포문을 열고 있으며, 동아시아 지역 형성은 일본에 변화한 역할을 주문하고 있다. 더 이상 정치적 보수화와 경제발전이 안온하게 손잡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에서 일본의 사회운동은 과거처럼 정치의 종속변수로 끌려 다니고말 뿐일지. 일본 시민사회의 힘을 과시한 각양각색의 자원운동, 생협운동이 우경화의 공범임을 자각할 수 있을지, 비판적 지식인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지 등은 언뜻 분별하기 힘들다.

/정진성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 50세 서울대 사회학과 졸, 미국 시카고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 저서 "현대 일본의 사회운동론" (나남) 등

■사민·공산당 "끝없는 추락"

일본의 좌파 정당들도 최악의 침체기에 빠졌다. 지난해 11월 중의원선거에서는 구 사회당인 사민당이 6석, 공산당이 9석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사민당은 당의 상징인 도이 다카코 당수도 소선거구에서 패배한 후 비례구에서 겨우 구제되는 등 그야말로 존폐의 위기를 맞고 있다.

한자리수 의석에 머문 공산당도 1970년대 이후 최저의 성적을 거둬 매우 낙심하는 모습이다. 이들은 총선 이후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자민-민주의 보수 양당구도 속에서 다시 살아 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지만 전망은 그리 밝지 못한 편이다.

한때 자민당과 함께 '55년 체제'를 구축하며 일본 정치를 이끌어 온 사민당의 몰락은 특히 충격적이다. 선거 기간 중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 반대'를 당론으로 내세운 사민당은 유권자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셈이 됐다. 사민당의 패배는 선거전 터진 잇단 당내 비리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사건 등으로 우경화된 국민여론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지지층의 노후화도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사민당을 비롯한 일본 좌파 정당의 몰락은 89년 냉전체제가 끝난 후 이미 시작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사민당과 공산당은 동서의 냉전 구도 속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결국 냉전 종식은 좌파 정당의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해 서서히 무너뜨렸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민당의 경우는 93년 자민당과의 연립정권을 구성한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당시 연립정권에서 총리를 맡았던 사민당의 무라야마 토미이치는 연정유지를 위해 당의 정책을 180도 전환했다. '자위대 합헌'과 '미일안보체제 견지' 입장, '히노마루(국기) 및 기미가요(국가) 인정' 등이 그것이다. 이로 인해 보수-혁신의 대립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됐고, 좌파 정당의 차별성과 존재의의도 없어지게 됐다.

일본의 좌파 정당들은 갈수록 보수·우경화하고 있는 일본의 사회 분위기속에서 더욱 더 어려움을 겪을 전망이다.

/김철훈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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