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에게, 음악 속에서 사랑을 찾기 바라며, 수잔.' 한달여 전 인터넷 헌책방에서 구한 '바흐'의 속표지에 쓰여 있던 문구였습니다. 책값 3달러에 태평양을 건너오는 비용 8달러, 총 11달러를 지불하자 76년전 사랑에 빠졌던 한 여성의 마음이 동봉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케임브리지과학책 한권과 함께 '조카 프레드를 생각하는 아저씨 버스와 아주머니 헬렌의 마음'이 도착했습니다.전쟁에 올인하는 강대국의 책을 구입한 것은 꺼려졌습니다. 그러나 수잔과 버스, 프레드를 만나면서 그런 마음은 사라졌습니다. 대신 제 마음 속에 남은 건, 한권의 책이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와 동시대를 살던 태평양 너머 어느 독자와 그의 손때가 묻은 책뿐이었습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제 삶보다 더 오래 되고 낡았지만 여전히 빛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헌책, 게다가 한마디 글귀로 2004년 동방의 반도에서 되살아나는 수잔, 그리고 제프리.
그러나 저는 이런 아름다움을 마냥 즐길 수만은 없습니다. 지난 주에도 출판사에서는 반품되어 돌아온, 그래서 더이상 한국의 서점에서는 자리잡지 못할 수천 권의 책을 뜯고 찢어 버려야 했습니다. 만들 때는 한줄의 문장을 가다듬기 위해 땀을 흘렸는데, 이제는 찢고 치우기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겨우 몇 권의 책만이 독자들의 품으로 돌아가 생존의 기쁨을 누립니다.
고서점을 배경으로 한 아름답고 따뜻한 영화 '84번가의 비밀문서', 헌책방만으로 세계적 명소가 된 영국의 작은 마을 헤이온와이, 새 책방보다 더 많은 책을 더 잘 분류한 채 독자를 맞는 도쿄의 서점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참고서와 아동 전집류, 덤핑서적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청계천 서점가가 청계천 복원과 함께 헌책의 명소로 부활할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다만, 정말 다만, 지금과 같은 전근대적인 유통시스템으로 인해 하루에도 수만 권씩 버려지고 찢기고 폐지로 사라지는, 한글로 만들어진 책에게 단 한번이라도 재생의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김흥식 서해문집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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