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A경찰서 이모(36) 경사는 살인이나 강도 등 주요범죄를 담당하는 강력반 소속이지만 요즘에는 하루종일 인터넷 채팅사이트를 뒤지거나 관내 PC방과 찜질방 등을 돌아보는 게 주 업무다. 가출 청소년을 상대로 한 원조교제 등 성 매매범을 검거하면 실적평가에서 강도나 절도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어서다.
실적을 올리면 이 경사뿐 아니라 소속 경찰서의 합계 점수도 높아져 간부들이 오히려 이를 독려하고 있다. 이 경사는 "강력사건 예방이나 강·절도사건 수사 등 민생과 직결된 경찰 본연의 업무보다 가출청소년 관련 실적의 점수가 높으니 그쪽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다"고 실토했다.
경찰청은 2월 부천 초등학생과 포천 여중생 살인사건 등이 잇따라 터지자 '민생침해범죄소탕 100일 작전'(2월17일∼5월26일)을 선포한 뒤 일선 경찰서별로 각 분야 검거건수를 점수로 환산해 순위를 매기는 실적제를 도입했다. 이달 말에는 우수 경찰서 및 경찰관에 대한 포상·특진도 약속돼 있다. 상황이 이렇자 경찰서마다 검거가 쉽고 배점이 높은 실종 부문에만 열을 올리는 반면 강도 절도 폭행 등의 전형적인 민생치안은 뒷전으로 미루고 있다.
경찰청이 부여한 100일 작전의 배점은 실종 관련 성범죄 5점, 강도 3점, 절도 갈취 마약투약 1점 등이다. 지난달 27일까지의 중간평가에서 1위를 차지한 경찰서는 배점이 높은 실종 부문에서 만점을 받았고 배점이 가장 낮은 마약 부문은 0점이다. 다른 경찰서들도 강·절도와 마약은 실종에 비해 절반 이하 검거실적을 보이고 있다.
서울 B경찰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 경찰서 형사들은 형사계 당직반에서 조사를 받는 청소년에게 눈독을 들인다. 이들을 통해 원조교제를 일삼는 가출 여학생을 찾아내 상대 교제 남성을 무더기로 검거하는 수법을 쓰고 있다. 덕분에 원조교제 전담 부서인 여성 청소년계는 100일 작전 시작 이후 단속실적이 전무하다.
실종 사건에 주력하는 사이 중요 미제 사건은 점점 미궁에 빠져들고 있다. C경찰서는 100일 작전 중간평가에서 하위권에 맴돌자 일반 수사인력을 5개반에서 1개반으로 줄이고 실적경쟁에 뛰어들었다. 지난해 말 관내에서 발생한 일가족 살인사건은 완전히 제쳐놓았다. 100일 작전의 발단이 된 부천·포천 살인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부천 남부경찰서와 포천경찰서마저도 수사본부 인력을 축소한 상황이다.
경찰의 신경이 딴 데 가있다 보니 민원인들도 불만이 크다. 김모(42)씨는 "D경찰서에 도난신고를 하니까 경찰관이 '범인이 잡힐 때까지는 분실사건으로 봐야 한다'고 말해 한바탕 입씨름을 벌였다"고 말했다.
/안형영기자 ahn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