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에 사는 나카하라는 아내와 두 딸을 둔 마흔여덟의 회사원이다. 단란한 가정에 직장 번듯한, 안정된 중년 남자다. 출장을 갔다 돌아오는 길, 그는 기차를 잘못 타 고향 마을에 내리고 그곳 어머니 묘소 앞에서 특별한 경험을 한다. 마흔여덟의 기억과 의식은 그대로인데, 몸이 열네살 중학생으로 돌아간 것이다.다니구치 지로의 '열네살'(샘터 발행·전2권 각권 7,000원)은 과거로 돌아간 중년 남자를 등장시켜 삶의 내면을 들여다본 수작이다. 문학적인 스토리텔링 구조를 갖춰 한편의 소설을 읽는 것 같다.
22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묘소 앞에서 나카하라는 어지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중학교 2학년, 열네살 소년이 돼 있었다. 고향 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외할머니와 여동생이 살고 있었고 학교에서는 친구와 선생님이 그를 맞아주었다. 마음과 기억, 지적 능력은 중년 남자의 것이지만 사람들은 심지어 부모조차도 열네살 몸의 나카하라를 그 나이 소년으로 생각한다.
과거로 돌아간 그는 나중에 일어난 일을 이미 경험했던 터라, 몇 년 뒤 일을 예언하고 어른의 영어 실력으로 다른 아이들을 압도한다. 예쁜 나가세의 마음을 사로잡고 소설가, 만화가를 꿈꾸는 친구들과 우정을 나눈다.
하지만 나카하라가 마냥 추억만 키우는 것은 아니다. 중학교 2학년이던 그 때, 아버지는 홀연 가족을 떠났고 어머니는 홀로 아이들을 키우고 결혼까지 시킨 뒤 나카하라의 지금 나이 즉 마흔여덟에 병으로 죽는다.
열네살 아들로 돌아간 나카하라는 아버지가 떠나고 그 때문에 어머니가 고생하다 젊은 나이에 숨지는 그 미래를 바꾸려고 한다. 그러나 나카하라는 아버지를 막아 섰으면서도, 상황에 밀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다며 늦었지만 이제라도 자신의 삶을 찾으러 떠나겠다는 아버지를 끝내 잡지 못한다. 아버지가 말하는 이유에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들어있었고 나카하라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한 것이다. 미래에 두고 온 가족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그들에게 돌아가야 하는가를 되뇌면서 나카하라 역시 아버지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만화의 내용처럼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카하라는 묘소 앞에서 잠시 잠들었고 그 사이에 꿈을 꾼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마친 나카라하.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다시 한번 슬퍼하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조용히 접는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을 향해 서둘러 도쿄행 기차를 탄다.
2003년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 최우수 시나리오상 수상작. 긴 여운이 남는다. 흑백 그림이면서도 입체감이 뚜렷하고, 독특한 상상력이지만 리얼리즘의 기초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다니구치 지로는 엔터테인먼트 요소보다는 삶을 되돌아보는 굳건한 작품을 그려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 '먼 목소리' '해경주점' '걷는 사람' '개를 기르다' 등의 작품이 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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