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 16대 총선 때, 분단국 선거에 통일정책이 이슈가 되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주한 독일인의 의문을 소개한 적이 있다.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대통령이 베를린선언을 내놓았으나 야당은 북풍으로 몰아 부쳤고, 여당은 97년 대선 때의 총풍 사건을 다시 꺼내 응수했다. 진지한 정책논쟁은커녕, 민족문제를 정치다툼에 악용하는 구태만 재연한 것이다.두 달 뒤 남북정상회담의 감동이 모두를 설레게 했으나, 결국 이 사회의 냄비 정서를 확인하는 것으로 끝났다. 집권세력은 순수한 열정으로 이념과 정책의 공감대를 넓히지 못한 채 보수진영의 간단없는 공세에 허둥대다가 임기를 마쳤다. 이어 이 정부 들어 대북 비밀송금사건으로 사법적 문책을 당하면서 햇볕정책에도 그림자가 드리웠다.
17대 총선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탄핵이슈가 압도한 상황에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북핵 해결을 위한 방북의지를 밝힌 파격조차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소감은 보수와 진보세력이 저마다 달랐겠지만, 사생결단하는 판국에 민심에 별반 영향주지 않는다는 산술은 비슷했을 것이다. 수구세력도 박 대표에 대한 기대 때문에 불만을 억눌렀을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용천 폭발참사에 보인 뜨거운 동포애는 놀랄 만하다. 보수와 진보, 여와 야가 한 목소리로 동포의 참상에 애타하며 지원을 외치는 모습은 사회가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달라졌을까 어리둥절할 정도다. 한나라당의 변화는 박 대표가 예고했지만, 남북정상회담 주변에서 "민족문제는 냉엄한 비즈니스"라고 찬물을 끼얹던 보수언론조차 뒤질세라 애틋한 동포애를 과시한 급격한 변모는 실로 연구 대상이다.
언뜻 변화는 진보의 괄목할 대두와 보수의 파격 변신이 사회 분위기를 바꾼 데 따른 것이다. 햇볕정책과 북핵 문제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부산 아시안게임과 대구 유니버시아드의 '작은 통일' 열기가 상징하는 민족화해를 통해 고양된 동포의식이 정치권 변화를 계기로 서슴없이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구세력도 완고한 대북태도를 고수하다가는 시대흐름에서 낙오할 것을 걱정해 짐짓 열린 자세를 보이는 듯 하다.
그러나 자기도취와 현상유지에 그토록 집착하던 사회전체가 낡은 냉전적 인식과 이기적 탐욕을 내버렸다고 보기는 이르다. 참사가 인도적 지원에 동참할 명분을 주었지만, 북한과 민족문제 인식이 근본부터 바뀐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이는 언론이 허황된 것으로 이내 드러난 김정일 암살음모설에 집착한 데서 그대로 드러난다. 김정일 처 고영희가 프랑스에서 신병치료를 받고 있다는 외신보도를 맹목적으로 옮긴 것도 그렇다. 이럴 때 으레 등장하는 뜬금 없는 보도는 폭발참사로 두드러진 낙후한 의료현실과 대조적인 북한 지도층의 호사를 부각시키려는 흑색선전 성격이 뚜렷하다.
북한이 전에 없이 신속하게 외부지원을 호소하고 현장을 공개한 사실은 외면한 채, 대뜸 폐쇄성을 나무란 것도 구태의연하다. 구호품을 보낸다고 북한지역 수백 ㎞를 종단하는 육로를 열라는 것도 무리한 요구다. 남쪽의 구호품 트럭 수백, 수천대가 북한 도로를 줄지어 메우는 상황을 수용하라는 요구는 동정 받는 쪽의 처지는 돌보지 않는 베푸는 자의 오만이다.
자화자찬하며 마냥 흐뭇해 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천박한 냄비 속성을 경계하고, 북한문제를 넓은 안목으로 보는 각성이 필요하다. 국제사회 누구나 동참하는 인도적 지원을 넘어, 철도 의료 산업 등 기반시설을 미리 돌보는 발상이 필요하다. 통일이 늦을 수록 통일비용도 늘 것이란 분석에 유념하면, 북한 인프라 지원은 우리 자신의 장래를 위한 투자다. 독일 통일의 길을 개척한 브란트는 이런 낭만적 상상력 없이 분단의 한을 풀 수 없다며, 민족 화해를 정신과적 치유에 비유했다. 이를테면 민족문제도 비즈니스로 보려는 실용적 사고에 젖은 사회부터 거듭 변해야 한다는 충고다.
/강병태 논설위원/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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