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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의 정치논평]이념의 시대는 끝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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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의 정치논평]이념의 시대는 끝났는가

입력
2004.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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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이념의 시대가 끝났느냐는 이념논쟁이다. 1950년대 다니엘 벨이라는 학자가 이념종말론을 주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68 혁명 등 이념의 폭발이 일어나 그는 공개 반성문을 써야 했다. 1980년대 말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후쿠야마라는 학자가 다시 자유민주주의의 최종승리에 의한 이념의 종말을 주장하고 나서 논쟁을 일으킨 바 있다.최근 여권에 때 아닌 이념논쟁이 일고 있다. 발단은 노무현 대통령이 직무정지 한 달을 맞아 취재기자들과 등산을 하면서 이제 이념경쟁의 시대는 끝났고 지배구조의 경쟁시대라는 화두를 던지면서이다. 원론적인 발언으로 끝났던 이 문제는 총선 후 본격화되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당선자 워크숍에서 정동영 의장이 "정당을 이념으로 규정해 융통성 있는 정책을 내놓지 못한다면 시대착오"라며 탈이념적 실용주의 노선을 주장하고 나섰고, 개혁당 출신의 김원웅 의원이 이 같은 노선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도 할 수 있는 말"로서 "그러면 국민들이 이회창이 아니라 노무현을 뽑은 이유가 없어진다"고 반박하는 등 논쟁이 생겨났다. 그러자 전윤철 감사원장까지 이념논쟁은 10년 전에 끝난 일이며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고 국제신인도를 높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훈수를 두고 나섰다.

물론 냉전시대의 낡은 이념논쟁은 이미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러 문제가 산적해 있는 상황에서 공허하고 관념적인 이념논쟁으로 허송세월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이념의 종말론도, 국제경쟁력 강화론도 그 자체가 하나의 이념이다. 그리고 인간의 의식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정치가 존재하는 한, 이념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아가 탈이념적 실용주의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간의,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과 이회창씨 간의 이념적, 정책적 차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김원웅 의원의 비판처럼 국민들이 한나라당이 아니라 열린우리당에, 이회창씨가 아니라 노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어야 하는 이유가 없다.

특히 주목할 것은 진보와 보수 간의 이념경쟁을 기본틀로 했던 많은 나라들과 달리 우리는 분단 이후 반공주의에 의해 보수 일변도의 정치가 지배함에 따라 이념경쟁이 존재할 수 없었다는 한국적 특수성이 있다. 또 87년 민주화 이후 민주 대 반민주의 정치구도를 대체한 것은 진보 대 보수의 이념경쟁이 아니라 지역주의였다. 따라서 언제 이념경쟁을 했어야 끝내고 자시고 할 것 아닌가?

사실, 우리의 경우 서구 등과 달리 형식적으로는 5·16 이후 43년 만에 처음으로, 실질적으로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진보세력이 원내에 진출해 본격적인 이념경쟁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이처럼 이제 처음으로 이념경쟁을 시작하려는 마당에 이념의 종말 운운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게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노 대통령의 주장대로라면 노무현 정부가 이념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지배구조, 즉 의사결정의 민주성 경쟁에 나서야 하는데 부안사태,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등이 보여주듯이 주요 사안마다 일방적인 행정독재를 하려다 엄청난 저항에 부딪쳐 왔다는 사실이다. 또 정 의장이 집시법 개악안에는 찬성표를 던지고서도 탄핵 반대 촛불집회는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이유로 합법적이라고 주장하는 등 이중적으로 행동해 온 것을 고려할 때(3월 23일자 본 칼럼 참조), 그가 말하는 실용주의라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때 그 때 원칙을 바꾸는 기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한국정치에 관한 한 이념경쟁은 끝나기는커녕 이제 처음으로 시작하고 있을 따름이다.

손호철/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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