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링크로스 84번지헬렌 한프 지음·이민아 옮김
궁리 발행· 8,000원
1949년 10월, 전후(戰後) 런던의 가을은 스산했다. 처칠이라는 불세출의 명장이 있어 다행히 제2차 대전 승전국의 명예는 얻었지만, 승전이 가져다 주는 실질적인 부와 20세기 세계사 재편의 주도권은 고스란히 미국의 손에 넘어간 뒤였다. 찬란했던 대영제국의 영광을 아득한 꿈처럼 간직하며 하루하루 정부가 배급하는 밀가루로 끼니를 때우던 그 시절, 런던 채링크로스 84번지 '마크스& 중고서적'에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저는 희귀 고서적에 취미가 있는 가난한 작가입니다. (…)제가 절박하게 구하는 책들의 목록을 동봉합니다. 한권 당 5달러가 넘지 않는 헌책이라면, 어느 것이라도 구매 주문으로 여기고 발송해주시겠습니까."
윌리엄 헤즐릿과 스티븐슨, 리 헌트의 산문선 그리고 라틴어 성서 중고판을 찾는다는 이 편지의 발신인은 뉴욕에 사는 무명의 여성 작가 헬렌 한프였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 두 권의 책자와 "다른 원하시는 목록을 모두 갖춘 탐스러운 서적을 구할 수 있는지 애써보겠습니다"라는 내용의, 정중하면서도 사려 깊은 답신이 대서양을 건너 뉴욕 변두리 한프의 집에 배달된다. 서점 직원 프랭크 도엘이 보낸 글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들의 편지는 책을 매개로 20년 간, 프랭크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이어진다. '채링크로스 84번지'가 바로 중고책 구매자 헬렌 한프와 마크스 서점 직원 프랭크 도엘이 주고받은 편지글을 모아놓은 책이다.
전체 분량이 200자 원고지 200매나 될까 싶은 이 책에는 참 많은 보물이 숨겨져 있다. 우선 무명작가와 서점 직원으로 살아가는 두 사람의 책에 대한 '절박한' 애정이 한없이 부러워지고,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으면서도 세상을 살아가는 서로의 고단함을 표 나지 않게 위로할 줄 아는 그들의 인간애가 그리워진다. 묻지 않아도 빤할 바다 건너 동료들의 생계를 위해 마른 달걀과 고기 상자, 나일론 양말을 보내는 한프의 마음 씀씀이라니….
무엇보다 중요한 미덕은 일기나 편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성을 이 책이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의 시대상을 장황하게 기술한 어떤 책도 이 편지 속에 살짝 살짝 그려진 풍경만큼 입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나를 매료시키지는 못했다.
고맙고 흐뭇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고 나서도 끝내 떨쳐낼 수 없는 아쉬움 하나. 이렇게 귀하고 사랑스러운 책이 왜 안 팔리는 거지?
/지평님 황소자리 대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