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뇌 속에서 최루탄 파편이 나타나는 순간 '드디어 끝났구나'는 생각에 맥이 탁 풀렸습니다."1987년 7월 7일 우상호 당선자는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고 이한열 열사의 부검 과정을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았다. 우 당선자는 "총학생회장이었던 내가 주도한 집회에서 쓰러진 한열이의 사인을 밝히지 못한다면 역사의 죄인이 된다는 생각 뿐이었다"며 "내가 맞아야 할 최루탄을 한열이가 맞았다는 생각으로 지난 17년을 살아왔다"고 말했다.
연대 81학번인 그는 80년대 민주투쟁과 통일의 꿈을 그대로 지닌 채 정치권으로 진출한 전형적인 386 정치인이다. 89년 졸업한 뒤 함께 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87년 민주정부를 수립하지 못한 우리가 개인의 안위를 위해 살면 안 된다"며 10년간의 재야시민단체 활동을 다짐했다. 이 약속을 지킨 98년에는 다시 모여 "정치권에 들어가 직접 변화를 주도하자"는 새로운 결의와 함께 정치에 뛰어들었다.
첫 출마였던 16대 총선에서는 동문인 한나라당 이성헌 의원과 격돌해 1%차인 1,300표로 낙선했다. 4년간 원외위원장으로 활동한 그는 "낙선자가 정치를 하면서 이만저만 민폐를 끼친 게 아니다"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는 이런 '민폐'를 감당하고 곁을 지켜준 지지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끈기는 85년 복학생 신분으로 운동권에 뛰어들 때 이미 예견된 것 같다. 그는 당시 주축이 84학번들이었지만 '운동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을 84학번으로 속이고 활동을 시작했다.
우 당선자는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했던 만큼 시대개혁과 통일에 관심이 많다"며 "국민과 공감 속에 개혁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한때 시인을 꿈꾸며 대학시절 교내의 윤동주 문학상, 5월 문학상을 수상했던 문학도이기도 하다. 국회 문화관광위를 지망한 그는 "출판사, 애니메이션 관련 업종에서 일을 했던 전문성을 살려 대한민국의 문화적 잠재력을 키우는데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고주희기자 orwel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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